며칠 전, 내일 녹색 어머니 담당이라서 출근이 늦을 것 같다는 선배의 이야기에 문득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내가 선배의 딸내미만큼 어리고, 우리 엄마가 지금의 선배만큼 혹은 선배보다 더 젊었을 시절. 엄마도 때때로 차례가 돌아오는 녹색 어머니를 하실 때가 있었다. 엄마가 지키고 서 있는 횡단보도를 괜히 지나가고 싶어서, 그날은 괜히 더 둘러서 등교하곤 했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직장 생활을 시작하셨고, 우리가 다 크고도 남은 지금도 현역 워킹맘이다. 나는 아직 엄마가 되지는 않았지만, 주변에 육아와 직장생활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대부분의 날들을 전쟁처럼 보내는 워킹맘들을 많이 보고, 또 이야기를 듣고 있기에 그 시절의 엄마가 더 대단하고 또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 시절의 엄마도 아마 우리를 다 재우고 난 밤이면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해도 누적된 피로에 기절하듯 잠이 들었을 수도 있고, 때로는 본인보다 우리에게 치우쳐져 있는 삶의 추가 버거워서 우리 몰래 눈물을 훔치는 날이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고작 몇 살 많은 그 시절의 엄마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고, 많은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엄마는 늘 씩씩했다.
그리고 우리도 그만큼 씩씩하게 키우려고 항상 노력하셨다.
동생은 꽤 자주 아팠는데, 동생이 학교에 가지 않으면 달리 아이를 봐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엄마가 꼼짝없이 휴가를 써야 했기 때문에 웬만큼 아픈 게 아니고서는 학교에 가야만 했다. 물론, 동생은 대부분 학교에 가면 언제 아팠냐는 듯 쌩쌩해지곤 했기에 엄마가 그렇게 단호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동생이 아프다고 했던 어떤 날 아침, 데친 배춧잎처럼 늘어져있는 동생을 엄마는 조금이라도 기운 차리라며 등에 업고 학교로 갔다. 등굣길에 같은 반 친구들에게 줄 간식거리를 사서 한 봉지 잔뜩 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옆에서 쭐래쭐래 엄마를 따라가던 나는 동생을 업는데도, 과자봉지를 드는 데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고, 마냥 우리 엄마가 힘이 세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때때로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에게 어떻게 그 시간을 다 견뎠냐고 물어보면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ㅡ 너희들이 엄마 힘이었지
ㅡ 그래도 이렇게 잘 커줘서 어찌나 고마운지
이제 그때의 엄마만큼 커버린 나는 아직도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곤 하는데,
동생을 업고 무거운 봉투를 들고도 꿋꿋하게 걸어가던 그날처럼, 우리를 위해 세상의 바람을 견뎌 온 그 시절의 엄마에게 너무나도 고맙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이제는 내가 엄마의 봉투를 나눠 들겠다고, 엄마에게 들이치는 바람을 막아서겠다고 비장하게 다짐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