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문화 전성기-5
*<인크레더블2(2018)>가 아닌 <인크레더블(2004)>에 대한 글이다.
세상을 구하던 히어로들이 정부와 시민의 요구에 따라 은퇴한다. 히어로들은 세상을 구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각종 재난과 사고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히어로들은 남들처럼 일상으로 되돌아가 시민 속에 섞여 산다……. 2004년, 극장 애니메이션의 붐을 일으킨 영화 <인크레더블>은 이와 같은 줄거리로 시작된다. 은퇴한 히어로가 부당한 관료기업 속에서 하루하루 무력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한국 관객만이 아니라 전세계 관객에게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인크레더블>은 극장 애니메이션이 단순히 가족들이 웃기 좋게 만들어진 영화라는 통념을 부수고, 어두운 사회의 일면을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렇다. 영화 인크레더블은 사회적으로 배태된 가치관과 일념, 정체성을 사회 속에 바로세우고자 하는 '인정투쟁'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영화 내적 오마주를 통해서도 충분히 드러나는데, 스토리의 발단이 되는 '히어로 금지법'은 80년대 히어로 만화계를 뒤흔든 <배트맨: 다크나이트 리턴즈> <왓치맨> 같은 DC코믹스 작품에서 숱하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80년대는 레이건과 대처에 의해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대였고, 미국 히어로 만화계는 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그 대표적 결과물이 바로 <왓치맨>과 <배트맨: 다크나이트 리턴즈>이다. 만화 <왓치맨>은 히어로들이 금지된 이후 소련과 미국의 군비경쟁이 심화된 세상,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이겨 핵전쟁 발발 직전까지 도달한 세상이 배경이며, <배트맨:다크나이트 리턴즈>는 ‘슈퍼맨’이 정부를 위한 무기로 종용되는 국가주의적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이와 같은 설정은 이후 만화 <DC: 더 뉴 프론티어>, 마블코믹스의 <시빌 워> 등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인크레더블>은 80년대 만화를 오마주하여 사회비판적 만화의 범주를 3D극장영화로 확장시킨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 ‘밥(미스터 인크레더블)’은 히어로 금지법 이후 관료제 사회 속에서 무능한 가장으로 살아간다. 그가 내리는 도덕적 판단은 회사입장에서는 불이익으로 간주될 뿐이다. 밥은 관료제라는 거대한 기계 안에서 톱니바퀴로 전락한 신세다. 히어로 금지법이 그의 정체성을 빼앗아, 그는 사회 속에 있지만 사회에서 추방된 인물이 된다. 밥이 히어로 자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은 관료적인 편향사회에서 정체성을 박탈당한 구성원의 분투를 대변한다.
일찍이 위르겐 하버마스는 복지국가의 한계를 지적하며 ‘공공영역의 재봉건화’라고 말했다. 시민적 주체가 봉건적 계급주의를 타파하고 건설한 민주적 '공론장'이, 산업시대를 거치며 엘리트 소수의 것으로 귀착된다. 언론은 자본에 의해 종용되고 정치는 소수 정치인들의 전유물이 되었으며, 다수 대중들은 생계유지에만 집중하며 살아간다. 복지국가의 금전 분배만으로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데, 여전히 일방적인 관료주의 시스템이 체계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금전적 화폐가 공동체의 의사소통을 대신하는 사회에서, '경제'행위만이 인간활동의 전부가 된다.
하버마스의 방대한 담론을 한 단락으로 장황하게 소략해버린 위 문단은, 일상적인 문장으로 재구성하면 간단한 결론이 도출된다: 사람은 각자의 정체성에 따라 '하고싶은 일'을 하는 대신, 그저 생계유지를 위해 돈벌이를 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영화 <인크레더블>은 이러한 담론을 바탕으로 중산층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토로하고 있다.
많은 중산층이 그렇듯, 밥은 가족이 있고, 집도 존재하며, 그나마 돈을 벌어먹고 살만한 직업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보험회사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보험회사의 간부 길버트는 관료적 문화에 침몰된 전형적인 인물이다. 길버트는 가난한 약자에게 보험료를 지급해주려는 밥의 판단에 일일이 간섭한다. 심지어 눈앞에서 강도가 무고한 시민을 공격하는 데도 '고객'이 아니라며 외면하고, 밥이 피해자를 구하러가려하자 해고해버리겠다고 협박한다. 분명 과장된 장면이지만, 길버트는 인간을 경제적 효용성만으로 파악하는 체제적 현실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호모 이코노미쿠스’로만 가득한 현실에서 밥의 정의로운 행위는 단지 경제적 효율을 충족하지 못하는 판단일 뿐이다.
만약 악당 신드롬이 밥에게 접근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밥은 여전히 ‘히어로’로 복귀하길 꿈꾸며 끝내 관료제의 쳇바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장이 되었을지 모른다. 밥이 정의감 때문에 길버트를 벽에 내동댕이쳤을 때, 뒤처리를 위해 정부요원이 찾아와서 말한다. “뒤를 봐줄 수 있는 예산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고. 히어로로서가 아닌 일개 시민으로서 밥의 정의구현은, 세금을 낭비시키는 오지랖에 불과하다. 회사에서 퇴출된 밥에게 기다리는 현실적인 미래는 예상 할만하다. 실직, 아니면 다른 관료기업으로 재취업이다. 밥에게는 ‘쓸모없는 인간’과 ‘기계의 부품’이라는 선택지만 남는다. 히어로가 되어 세상을 구할 기회, 좀 더 정의로운 세상을 건설할 기회는 영영 사라져버렸다. 자기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은, 주어진 위치에 만족하며 꿈만 꿀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체성’에 관한 문제는 밥만 아니라 그의 가족 전부가 고심한다. 아들 대시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싶어 하지만, 딸 바이올렛은 “우리 가족은 정상이 아니야!”라며 자신의 능력을 비정상적인 범주에 고착시킨다. 이 같은 바이올렛의 절규는 정상-비정상 범주를 나누는 사회적 부조리와 직결된다. 가족 구성원이 지닌 초능력이 결코 남들과 차별받아야할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님에도, 바이올렛은 초능력 때문에 ‘정상’이라 불리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로 구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히어로 금지’, 나아가 초능력이 금지된 사회에서 비롯된다.
남들과 다른 무언가는 ‘은폐되어야할 것’으로 변질되고, 차별이 전화되는 과정은 우리사회에서 자주 목격된다. 장애, 희귀병, 소수의 성 정체성은 종종 일반적인 범주에서 동떨어져나간 특별 취급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들이 ‘다수’와 다르다고,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난 행위를 한다고 차별받을 이유는 없다. 정상-비정상의 구분은 사회적 다수가 차지하고 있는 권력이 얼마나 억압적으로 작동하느냐를 보여준다. 소수자들을 ‘비정상’의 범주에 묶어둘 권리는 누구한테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경직된 사회에서 ‘비정상’은 용납할 수 없다. 바이올렛이 스스로를 비정상이라고 낙인찍은 것처럼, 경직된 사회는 소수자들이 자발적으로 다수의 기준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밥의 가족은 종국에 ‘히어로’라는 새로운 정체를 말미암아 초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한다. 여기서 초능력은 은폐되어야할 대상이 아니라, 시민의 지지를 받아 적극 활용되어야할 능력으로 변모한다. 공교롭게도 도시(사회)가 빌런의 습격으로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줄곧 천대받았던 ‘별종’은 절실한 ‘구원자’가 된다. 이처럼 한 인간의 특징과 정체는 사회가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 이미지는 달라진다. 공동체의 인정 범위가 밥과 가족의 본질적 정체(초능력자-히어로)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확장된 것이다.
<인크레더블>의 빌런 '신드롬'의 최종목적인 “모두가 초인이 되는 사회”는 걸핏 평등이념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체성이 말살된 사회’에 가깝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 없는 사회”, 즉 각자의 정체성이란 무의미해진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 히어로에 대한 사적인 복수심은 신드롬을 기계적 평등에 입각한 이념으로 이끌었다. 신드롬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어떤 존재였는가’에 대한 물음 따윈 저버리고, 초능력을 강제적으로 이식해 획일화된 존재들을 생산하려 한다. 히어로 고유 정체성을 인정받길 갈망하던 밥과 정확히 대립되는 캐릭터인 것이다. 영화 <인크레더블>은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가족이, 획일성이라는 거대한 악에 맞선 고군분투기라고 할 수 있다.
<인크레더블>이 그토록 미국에서 높은 평가를 얻은 이유는,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풍경을 솔직하게 녹여냈기 때문이다. 중산충 가정 구성원이 히어로 정체성을 (되)찾고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가족 공동체의 신뢰성을 회복한다.
혹자는 <인크레더블>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옹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정상가족(일부일처제)에 집중하고 있으니 이 말이 마냥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정상가족의 묘사를 통해 타주체(대안가족)를 일부러 배제한다거나 가부장제를 의도적으로 옹호하고 있진 않다. 그리고 앞서 살펴봤듯 <인크레더블>은 소수자 가족을 어느 정도 비유하고 있다. 물론 영화 속에서 이들은 성역할이 고정된 가족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능력 있는 여성’조차 가사노동에 내몰려지는 현실을 담아낸 것이기도 하다.
오히려 이 영화는 '정체성' 찾기에서만 답을 내리고 있기에 미진하다. 관료주의 사회에서 소외를 이겨내는 방식으로 인크레더블 택한 방법은, 관료주의에서 탈출해 '히어로'로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기존의 집단(관료제 기업)에서 '탈주'하여 대안공동체(히어로 가족)를 만들어 인정의 영역을 넓히는 방식은 들뢰즈식 노마디즘을 함축한다. 노마디즘은 기존의 체제를 전복하여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대안 공동체를 설립해 기존의 것에서 탈주하는 방식을 택한다.
<인크레더블>의 히어로 가족도 마찬가지로 자기정체성의 주체적 부여에 그칠 뿐, 기존의 관료제 사회에 맞부딪치며 직접 기존 체제에 수정을 가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히어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관료화된 시스템 속에 순응하며 살아가야할까? 아니다. <인크레더블>은 그들 역시 자기 고유한 정체성을 찾아 ‘노마드’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선택지의 한계가 다분한 상황에서, 그것도 생계유지가 최대의 가치로 받아들여진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자기정체성만 지향할 수 없다. 정체성만을 되찾아 탈주하는 게 아닌, 기존의 시스템을 수평적으로 구성해 다원적 정체성이 공존할 수 있는 미래를 구축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은 성실한 세일즈맨이 투자가치가 사라지면서 결국 파국에 이르는 자본주의적 현실을 그렸다. 영화 <인크레더블>은 정체성이 박탈당한 히어로가 관료주의 사회에서 몰락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는 수많은 세일즈맨과 히어로맨들이 ‘죽음’에 이르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