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치는 “총체적 세계 대한 열망”이 소설을 쓰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총체적 세계, 즉 ‘천국’이 건설된 세계를 꿈꾸는 자들은 소설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언제나 그들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며, 어딘가에는 천국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환상을 품는다. 영화 <천국보다 낯선>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영화이다. 헝가리에서 이민 온 여자와 남자, 그리고 그들의 친구. 이 셋은 ‘천국’을 찾기 위한 여행길에 오른다. 그러나 그들의 ‘천국 찾기’는 실패한다. 아니, 그들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
‘이민’이라는 단어는 낯선 세계에 대한 열망을 제공한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아닌 새로운 땅,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세계에서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막연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민의 대상이 되는 세계는 우리에게 어떤 ‘천국(paradise)'이 된다. 그러나 ’천국‘이라는 단어는 본래적으로 환상을 내재하고 있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동물만이 천국에서 추방되지 않았다”고 한다. 천국은 모든 것을 만족시켜주는 세계이며, 동물만이 본능적인 만족을 구가하는 삶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본능적인 삶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며, 일상의 반복에서 탈피하고자 한다. '천국'이 인간의 모든 것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공간이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그곳은 언제나 실현될 수 없는 환상의 공간으로 남아있다.
<천국보다 낯선>은 천국을 향해가는 로드무비다. ‘신세계’로 시작하는 첫 장은, 비록 그 ‘신세계’에 도착하기 이전의 과정―헝가리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과정―은 보여주지 않지만, ‘신세계’에 도착한 ‘에바’에게 초점을 맞춘다. 에바는 헝가리 이민자다. 헝거리 이민자에게 미국은 ‘신세계’이자, 어쩌면 ‘아메리칸 드림’을 가능하게 하는, ‘천국’에 가까운 공간이다. 때문에 그 이전의 과정을 보여주지 않아도, 우리는 에바가 미국에 가졌을 법한 환상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민자들에게 미국은 ‘천국’이었는가? 에바의 기행을 통해서 영화는 그것이 환상임을 낱낱이 보여준다. ‘신세계’는 에바가 뉴욕의 골목을 지나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부푼 꿈을 가지고 미국으로 날아온 이민자에게 비친 미국의 첫인상은, 온통 낙서로 가득한 건물들과 더러운 뒷골목뿐인 세계이다.
천국과는 상반된 지저분한 세계에 이어, 에바에게 문화적인 충격을 주는 장소는 다름 아닌 ‘윌리’의 방이다.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은 “생활세계”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생활세계는 객관화되고 수치화된 자연과학적 세계와는 달리 ‘주체’를 드러나게 해주는 공간이다. 즉 인간적 주체를 구성하는 그 모든 ‘세계’를 의미한다. 에바에게 윌리의 생활세계는 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공간이다. 여기서 에바의 생활세계에 ‘이민자로서의 미국인의 삶’이 그녀를 구성하는 의미지평으로 침투하게 된다. 주거환경부터 취미, 식습관까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사회화되는데, 이 과정에서 에바는 기존에 가졌던 단단한 의미지평과 충돌을 겪는다. 어떤 식재료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티비디너, 멍청한 스포츠 같은 미식축구, 침대 두 개면 꽉 차는 단칸방 등등. 천국의 문화와 삶은 단순함과 지루함으로 얼룩져있다. 그러한 삶을 ‘신세계’라고 부른다는 것은, 이민 전에 대상화 되었던 ‘미국’과 이민 후의 경험된 ‘미국’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대상화된 천국은 단지 허구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세계’를 겪는 것은 단지 에바뿐인가. 그렇지 않다. 소제목 ‘신세계’는 윌리의 생활세계의 변화를 지시하는 제목이기도 하다. 윌리는 자신의 집에 에바를 받아들이면서 생활형태가 완전히 낯설어짐을 경험한다. 아메리칸 드림의 실패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윌리는 처음에 자신의 전형적인 생활방식의 틀에 에바를 끼워 맞추려 한다. 그러나 에바는 도통 그 전형성에 맞물리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단칸방의 환경을 새로이 만든다. 즉 윌리는 기존의 공간이 타자에 의해 재정립되어져 ‘신세계’가 된 공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윌리는 에디와 함께 도박을 쫓아다니고, 스포츠를 통해서 일말의 쾌락을 얻는다. 그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한 치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영화는 그의 어떤 예술적 취미에 대한 일말의 언급도 없으며, 음식조차 그에게는 쾌락의 대상이 아니다. 물질 혹은 경쟁적인 게임만이 쾌락을 가져다주는 삶은, 자본주의적 시장체제 아래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대중의 삶이다. 윌리가 아메리칸 드림에 실패했다는 단서는 이러한 정황을 통해 드러난다. 반면 에바는 생활환경에 활기를 부여한다. 에바를 방에 들이면서 변모하는 풍경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윌리는 에바로 인한 생활세계의 변화를 낯설어 하지만, 나중에 가서 그것이 곧 ‘인간성’이 되살아난 환경임을 깨닫는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동물처럼 반복되기만 하는 삶을 산다고 해서, 본능적 쾌락만 만족된다고 해서 모든 만족을 얻지 못한다. 에바가 등장하기 이전의 삶은 그러므로 ‘동물로서 천국’에 불과했던, 전형적이고 진부한 일상만 반복되었던 삶인 반면, 에바를 통해 경험된 ‘신세계’는 동물이 아닌 인간다운 삶에 대한 열망을 던져준다.
에바가 윌리의 생활세계를 거치면서 ‘폐허가 된 천국’을 현시한다면, 윌리는 에바에 의해 동물적인 삶에서 ‘인간적인 삶’으로 이행한다. 에바가 떠난 이후 윌리의 태도에서 짙은 고독을 엿볼 수 있다. 친구였던 에디는 새로운 의미지평을 확립시켜주는 타자가 아니라 기존의 생활세계를 지탱해주는 하나의 구성요소에 불과하다. 에바가 떠난 이후 윌리는 다시 진부한 삶을 향해 침잠해나간다.
아메리칸 드림의 실패자들이 단지 패배한 삶 속에만 안주하려 하는가? 아니다. 윌리는 에바가 떠난 이후 이전처럼 도박에 빠져 지내지만 인간적 삶을 완전히 저버리지 못한다. 그는 전형적인 삶에서 벗어나 무언가 성취가 가능한 공간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물론 윌리는 무엇을 성취해야하는지 모른다. 단지 자신의 만족을 충족시켜줄 자리를 찾아 배회할 뿐이다.
윌리와 에디가 차례대로 거치는 지역은 “클리블랜드”와 “플로리다”이다. 각 도시는 윌리가 거주하는 “뉴욕”처럼 미국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민자들에게 천국이라고 대상화되는 세계는 이제 ‘미국’이라는 막연하고 거대한 대상에서 ‘플로리다’와 ‘클리블랜드’처럼 좀 더 구체화된 대상으로 이동한다. 이민자들은 뉴욕에서 오래 전 아메리칸 드림의 좌절을 겪었으나, 여전히 ‘아름다운 세계’로 상징되는 미국 도시들에 대해서는 환상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플로리다는 “드넓은 해변과 비키니 입은 여자들”이라는 기표로, 클리블랜드는 “멋지고 커다란 호수”라는 기표로 이미지화 되어, 두 도시가 어쩌면 ‘천국’일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미디어를 경유한 이미지들이 수없이 쏟아진다. ‘이미지’는 어떤 대상의 본질이 되는데, 이미지에 의해 형성된 본질은 대상의 실재성과는 괴리된다. 그러나 그것이 대상의 본질인 이유는, 다수 대중들이 그것의 실재가 어떠한지 겪기도 전에 이미지를 대상의 실재라고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월리와 에디는 그러한 이미지 수법에 걸려든 수많은 대중 중 한 명이다.
월리가 클리블랜드로 떠나는 결정적 계기에는 ‘에바’도 포함되어 있다. 에바는 ‘인간적 삶’을 상기시켜준 인물이다. 동물의 천국에서 인간적 삶으로 돌아온 윌리는 ‘인간의 천국’을 희망하게 된다. 좌절된 아메리칸 드림의 공간이었던 ‘뉴욕’에서 벗어나 ‘클리블랜드’에서 인간적인 삶의 불씨를 점화시켜준 ‘에바’를 만난다는 것은, 월리가 천국의 가능성을 점쳐보려 하는 의지가 무의식중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에바가 살고 있는 세계에 도착하면 인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어렴풋한 희망을 쫓아 윌리와 에디는 클리블랜드로 떠난다. 그러나 에바는 숱한 다른 이민자처럼 전형적인 삶 속으로 전락해있다. 뉴욕의 윌리처럼 도박에 빠져있는 건 아니지만, 돈을 벌기 위해 패스트푸드 식당의 점원으로 고된 나날을 이어나간다. 뉴욕이라는 ‘폐허가 된 천국’을 지나간 이민자 에바에게는 클리블랜드 또한 허구적인 낙원에 불과하다. 클리블랜드의 ‘에바’와 뉴욕의 ‘에바’는 이 지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윌리의 방에서 인간의 관한 일말을 꿈을 선물해준―에바 자신은 몰랐겠지만―사람과, 폐허가 된 세계를 인정하고 거기에 적응하여 안주하려는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
클리블랜드라는 이미지의 환상은, 이민자 일행이 호수에 도착했을 때 정점에 달한다. 시선이 닿지 않은 곳까지 펼쳐진 하얀 설원, 거기에는 영화 속 에바의 대사처럼, “아무것도 없다.” ‘아름다운 도시’라는 실재성 없는 이미지의 본질은 결국 공허한 것이다.
물론 에바가 완전히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존 루리”의 노래는 ‘인간적인 삶’의 상징물이다. 첫 장 '신세계'에서도 더러운 뒷골목을 걷는 에바에게 좌절감을 조금이나마 환기해주는 노래이며, 윌리의 방을 결정적으로 활기차게 만든 것도 이 노래이다. 그리고 플로리다를 떠날 때 에바는 줄곧 이 노래를 들으며 ‘천국’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 왜 인간은 천국에 대한 갈망을 끊임없이 표출하게 되는가. 루카치는 인간이 잃어버린 총체적 세계를 회복하려한다고 하고, 라캉은 가부장적인 상징계(사회적 질서)에 의해 어린 시절의 무한한 욕구가 거세되어, 그러한 억압이 “실재계”를 향해가고자 하는 욕구를 표출시킨다고 말한다. 총체적 세계이든 실재계이든, 그것들은 인간의 결핍을 모두 채워줄 수 있는 세계를 지시한다. 영화에서는 그것이 ‘천국’이라고 한다. 인간은 신에게 반기를 들고 천국에서 추방되어 영원히 지상만을 떠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근원적 고향인 낙원에 돌아가기를 바란다. 에바, 윌리, 에디는 지상의 삶에서 어떻게든 천국을 찾아보려 해매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클리블랜드에서 파괴된 환상을 뒤로 하고 플로리다로 떠난다.
허구를 쫓아 방황하는 세 인물들의 포착하는 카메라는, 공교롭게도 상당히 물질화되어 있다. 카메라의 시점은 항상 하나의 공간에 고정되어, 그 공간 안에 있는 인물들을 다 같이, 그리고 정적으로 비춘다. 어디에도 클로즈업이나 플래시 커팅 같이 긴박함을 살리는 기법은 없다.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이상적인 세계를 현실의 땅에서 찾아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영화 속 공간은 단순한 배경적 입지를 가진 게 아니라 중요한 상징적 입지를 차지한다. 영화의 전체적 배경은 미국이고, 각 장을 통해 공간적 구분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더욱 세분화된 공간들은 카메라의 이동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카메라는 공간이 완전히 구분되지 않는 이상 인물들을 한 시점에서 지속적으로 비춘다. 아무런 주관이 들어가지 않은 객관적인 시점으로 마치 감시카메라가 관찰하는 듯하다. 이러한 즉자적 시선은 바로 공간의 시점이 그대로 반영되어 탄생한다. 영화의 화자는 결국 인물들이 서 있는 공간들 그 자체인 것이다.
즉자적 시선의 기능은, 객관적 시점으로 바라본 인물들의 삶이 어떤 지 드러냄과 동시에, 각 인물의 내면묘사에는 안중 없는 외면화된 시선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것인지를 알려준다. 주관성이 반영되지 않은 건조한 시선은 이미 사물화 된 미국식 자본주의적 시선이기도 하다. 이민자들의 도피처는 물질을 위한 노동 혹은 그런 행위들을 반복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윌리와 에디는 어떤 지역에 가던지 도박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한 전형적인 삶은 곧 물질화된 삶을 지시하며, 그 삶을 포착하는 시선조차 물질화되어 있다.
이러한 건조한 삶의 표현을 위해, 영화는 음악조차 최소한으로 사용한다. 답답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살아나게 바꿔주는 장치는 오직 존 루리의 음악뿐이다. 그렇게 존 루리의 곡은 몇몇 짧은 상황에서만 흘러나옴에도,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 부상한다. 쇼펜하우어는 음악만이 인간을 구원하고 물자체를 그나마 현시할 수 있는 매개라고 한다. <천국보다 낯선>에서 세 인물이 구원되는 순간은 단지 음악을 틀어졌을 때로 국한된다. 이들은 건조한 삶에서 벗어나 음악을 통한 구원의 세계로 도망치지만, 그 구원된 세계를 음악 매개로 해서를 제외하고는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염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쇼펜하우어식 방안―예술과 같은 행위로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식의 논조―은 그것이 일시적이고 구체 현실적 대안이 부재하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 영화 속 세 인물 역시 다른 공간으로 탈피하거나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현실의 고통을 승화하려고 한다. 이러한 현실을 무조건 외면하고 자기도피처만을 찾는 움직임은 결국 필연적인 실패를 부른다.
<천국보다 낯선>은 명백하게 노마드적 방법의 실패를 함축한다. 노마디즘은 “어떤 외부적인 체계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탈주하면서 사는 것”이다. 영화 속 세 인물이 선택하는 방식은 충분히 노마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이전의 공간에서 다른 새로운 공간을 찾아다니면서, 그 ‘전형성’에서 탈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형성에서 탈피를 성공하였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2부에서 에디는 얼어붙은 클리블랜드의 풍경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상해. 여긴 처음 오는데 아무리 봐도 전부 똑같은 거 같아.” 이 말의 본연은, 공간은 달라졌으나 삶의 방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지시한다.
3부 ‘천국’ 편에서는 그 점을 확실히 지적할 수 있는데, 윌리와 에디는 플로리다 해변까지 찾아왔으면서 하는 짓이라곤 도박과 경마 밖에 없다. 뉴욕에서 하던 짓거리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내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수정은 가해지지 않으면서, ‘해변’이라는 상징적 공간에 차지하는 공허한 천국의 이미지로만 욕망을 해소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이 닿으려던 해변이 상징적 ‘해변’과는 전혀 다른 공간임을 직시했을 때, 인간들은 좌절감을 겪는다. “너희를 괜히 따라왔다”고, 에바는 에디와 윌리를 향해 부르짖는다.
내적 삶에 대한 반성 없이, ‘도피처’만을 찾아 탈주하는 삶은, 다시 그들이 탈주하고자 했던 기존의 강력한 규범성에 의해 옥죄일 수밖에 없다. 윌리와 에디는 도박에서 잃은 돈을 경마내기로 회복하려하는, 끊임없는 물질에 대한 질주를 반복하고, 에바는 우연히 얻은 일획천금의 기회로 한시름을 놓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들 중 실질적으로 천국의 구원을 받은 자는 한 명도 없다. 이들은 물질이라는 기존 규범의 강력한 힘에 의해 파편화되고, 그 파편화된 현장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움직임만을 지속한다. 2부 초반에 에디는 블루칼라 노동자를 보면서 “불쌍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블루칼라 노동자와 에디의 차이는, 단지 기존 ‘공간’을 탈주하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이 둘은 물질적 규범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천국’에 닿지 못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천국의 허구를 깨달은 자는 이제 어디로 탈주해야하는가. 그들에게 남은 공간은 ‘천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했던 또 다른 환상인 ‘고향’이다. 머나먼 이국에서 고향에 대한 이미지는 ‘읽어버린 천국’이라는 기제로 작동하기 충분하다. 그곳에는 이국에는 없던 과거의 추억이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고향에 대한 미화나 다름없다. 에디는 헝가리를 향해 노마드를 지속하고, 에바는 또 다른 탈주는 해결책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남는다. 그리고 에디는 이 둘 사이의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공백으로 제시된다.
기존의 규범체계를 되돌아보지 못하는 탈주는 진정한 해결책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그것은 종국에 기존의 전형성만을 반복하는, 시시포스적 삶만을 영원히 이어내는 지경까지 전락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천국 찾기”가 아니라 “천국의 건설”이다. 규범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뿌리부터 들춰내어 스스로 천국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