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스카 Aug 28. 2018

소셜 네트워크 시대와 ‘정보의 밀림’

영화 <서치>

반전과 반전, 흑막 뒤의 또 다른 흑막. 이런 플롯은 스릴러 장르의 전형적인 산물이 되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에게서 정점을 찍은 ‘반전서사’는, <메멘토>나 <인셉션>에서 보여준 의미 있는 장치가 아니라, ‘반전’ 그 자체의 쾌감만을 즐기는 피상적인 오락거리로 전락해버렸다. 영화 <서치> 또한 그런 의미에서 네리티브적인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쩐지 끼워 맞춘 것만 같은 수상한 주변인들, ‘반전’만을 위해 일부러 대기시켜놓은 진짜 흑막. 누군가는 <서치>를 여타 흔한 스릴러 영화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서치>의 네러티브에는 허점만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영화역사상 중요한 기술적 실험을 시도한 작품으로 남겨질 수도 있겠다. 영화의 전개를 오로지 컴퓨터 화면으로만 보여준다는 기술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앓는 고통 속에 ‘소셜 네트워크’라는 현대적 기술이 깊이 침투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영화 <서치>는 소셜 네트워크 시대의 소통과 정보의 오염성을 적절하게 녹여냈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자유주의적 '정치적 올바름'의 긍정적 전형이다. 주인공들은 전부 ‘미국에 사는 동양인’이지만, 어설픈 오리엔탈리즘 따위 내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이 이들을 한국계라고 예측할 수 있는 부분은 ‘김치’로 요리를 하는 장면을 제외하곤 없다. 외면만 동양계라는 특징을 드러낼 뿐이지, 이들 역시 평범한 미국 시민으로 묘사된다. 동양인에 대한 편견으로 구성된 가족이 아닌, 동등한 ‘미국 시민’으로 다루어지는 가족이다. 통상적으로 백인 중산층을 주인공 삼는 일반적인 미국 가족 영화를 생각해봤을 때, 평범한 미국 시민인 동양인 가정이란 설정은 중요한 전유 지점이다.     


그러나 이들은 영화 속 주인공이기에 그저 ‘평범’할 수만은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특수해지는가. 바로 딸 ‘마고’의 실종으로부터 가족의 특수성이 야기된다. 역설적이게도 아버지 ‘데이빗’은 마고의 실종으로부터 딸의 진면모를 마주한다. 그러나 그 진면모는 딸의 자필일기나 전호번호부, 혹은 편지 등의 아날로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데이빗은 딸의 온갖 소셜 네트워크 계정을 들여다보며 그녀의 행방을 의문시한다. 심지어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친구가 한 번도 만나본적 없는 개인방송의 시청자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실 데이빗이 마고의 소셜네트워크 계정을 들여다보기 이전부터, 이미 그가 최신화된 디지털 소통 양식으로 둘러싸여있는 것이 묘사된다. 마고가 어디 있든 메신저로 소통하고 통화하며, 업무 도중에도 메세지를 용이하게 주고받는다. 이처럼 사적 공간의 구성과 소통은 소셜 네트워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지점에 이르렀다.     


모든 게 컴퓨터, 노트북 화면으로만 전개되는 <서치> 

그러나 앞서 아버지가 딸의 진면모를 ‘실종’되었을 때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고 서술했듯, 디지털 소통의 용이성이 증가했다고 그것이 진정한 소통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마고의 수많은 페이스북 친구들은 그저 인사만 주고받는 피상적인 관계였다. 아버지 역시 딸과 매번 메신저로 통화하고 메세지를 주고받지만, 딸이 무슨 아픔을 겪고 있는지 모른다. 이 모든 상황은 정보화 기술발전을 역설한다.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늑대소년이 늑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것처럼, 현대인은 사물의 밀림에 둘러싸여 있다고 했다. 소셜네트워크 혁신 이후의 우리는 정보의 밀림 속에 내던져져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웃과 친구, 사회에 대한 정보를 주입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정보가 진실인지 판별하기는 힘들다. 또 다른 정보의 범람이 우리의 감각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마고’의 실종사건이 메인 뉴스를 장식하고 난 뒤, ‘소셜네트워크’ 공론장의 한계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운 가설이 등장하고 페이크 뉴스가 터져 나온다. 정보의 빠른 소비가 숙의적 정치학이 아니라 음모론을 양산해내는 어두운 현실이 관객 앞에 드리운다. 그리고 영화 종국에 이르렀을 때, 개개인의 정체성마저도 소셜네트워킹의 세계에서는 손쉽게 다른 존재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 폭로된다. 흑막 뒤의 인물은 이를 이용해 사건의 구성을 재배치하여 그럴듯한 결론으로 진실의 헤게모니를 그러쥔다. 정보화의 밀림 속에 익명적 정체성과 페이크 뉴스가 침투하고, 우리는 눈앞에서 진실이 재조직되는 풍경을 마주한다.     


흥미로운 점은 데이빗의 디지털 도구 활용과 집요한 소셜네트워크 추적이 진실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존재하는 손쉬운 정보 탐색과 소셜네트워킹은 단순 부정적 경향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미디어가 자칫 권력에 의해 상업적이고 조작화된 정보로 전염될 수 있지만, 반대로 교육과 진실을 전달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듯이, 소셜네트워크 역시 양면성을 지닌다.     

소재만 내세우고 내용적인 고민이 부재했던 영화 <언프렌디드>

<서치>는 정보화의 밀림을 질주하는 한 남자를 통해 소셜네트워크 세계의 허점을 고발한다. 동시에 이제는 소셜네트워크와 개개인이 필연적으로 연관된 ‘소셜네트워킹된 생활세계’를 탁월하게 묘사한다(영화 속에서는 거의 모든 소통을 컴퓨터와 노트북으로 해결한다!). ‘소셜’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만 내세우고 내용적인 고민이 없었던 공포영화 <언프렌디드>와 달리, <서치>는 기법적으로, 그리고 네러티브적으로 현시대의 소통과 정보수집에 관해 고심한다.     


이제 우리가 <서치>를 보고 던져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다. 소셜네트워크가 무조건 부정적이기만 한가. 그게 아니라면 소셜네트워킹 서비스에 대한 어떤 제도적 보완이 가짜 정보의 범람을 제어할 수 있는가? 미래시대의 정보화 시스템은 어떻게 구성될 것인가? 만약 이 같은 질문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데이빗’처럼 정보의 밀림 속을 방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관람작(8월 22일) 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천국 찾기의 실패, <천국보다 낯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