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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카 Apr 09. 2018

바톤 핑크,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예술가

20세기 초중반으로 예측되는 시대, 바톤 핑크라는 이름을 가진 한 극작가가 할리우드에 스카우트된다. 바톤 핑크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극으로 올려 뉴욕 연극계에서 꽤나 유명해진 극작가이다. 그러나 정작 할리우드에 가서는 아무런 글도 쓰지 못한다. 그를 방해하는 것은 너무나 많다. 그러다 한 악마 같은 남자와 조우하게 되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비로소 필생의 역작을 완성한다.


바톤 핑크(위)와 찰리 매도우(아래)


영화 <바톤 핑크>는 코엔 형제의 1991년 작품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거머쥐었다. 영화는 내내 예술 작품을 만드는 한 남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이 시대의 예술이 어떤 혼란과 격정을 겪고 만들어지는 지 다루고 있는 것이다. 배경이 2차 세계대전 직전 혹은 금주법이 시행되는 시절처럼 보인다고 해서 우리세대에게 무언가를 전해주지 못하는 게 아니다. 알레고리가 우리세대에도 유효한 의미를 갖기만 한다면, 그 이야기는 충분히 명화로써 받아들일 수 있으니 말이다.


기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은 과장되고 뒤틀려있다. 가장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던 ‘찰리 매도우’ 역시 피로 점철되어 있는 살인마였다. 찰리 매도우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바톤 핑크가 진정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였는데, 이 지점에서 관객들은 의문을 던지게 된다. 찰리 매도우는 바톤 핑크의 분신일 수도 있고, 정신에서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일수도 있지 않을까? 그가 살해한 여비서와 술 취한 소설가는 진짜일까? 혹은, 수많은 서사 장르에서 제시되는 ‘예술가와 악마’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의문들의 종합이 시사해주는 바는, 사실주의적 방식으로만 이 영화를 해석한다는 것은 이 영화의 의의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톤 핑크>에 등장하는 다양한 알레고리와 상징들을 심도 있게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할리우드, 자본주의의 성전, 그리고 가부장



이 영화에서는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아름다운 풍경 따위는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대신 그가 묵는 허름한 ‘호텔’과 대조되는 공간이 두 번 제시되는데, 하나는 캐피틀 영화사의 사무실이고, 또 하나는 영화사 사장의 으리으리한 저택이다. 말인즉슨,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의 본질적 영역을 이 두 공간에 담아낸 것이다. 바톤 핑크는 할리우드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캐피틀 영화사를 찾는다. 캐피틀 영화사는 공간 그 자체로 자본주의적 상징계를 구축하고 있다.


‘캐피틀’이라는 기호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캐피탈(Catal), 바로 자본이다. 미국 영화산업은 자본주의라고 하는 상징계의 질서 안에서 돌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캉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진리 지점’ 따위는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진리 지점’은 다름 아닌 기표가 상징계의 질서 안으로 포섭되었을 때를 의미한다. 사회적 약속들로 규정한 것이 ‘진리’로 착각되어 지는 것이다.                       

캐피틀 영화사의 풍경. 동상을 주목하라.

 캐피틀 영화사의 사무실 장면에서 바톤 핑크의 어깨너머로 거대한 구를 들어 올리고 있는 인간 동상이 있다. 동상이 힘겹게 들어 올린 구에는 ‘캐피틀’이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박혀 있다. 거대한 구를 들어 올리고 있는 남자, 아틀라스가 연상되지 않는가? 아인 랜드의 소설 ‘아틀라스’에서 아틀라스는 노동자들을 책임지는 짐을 짊어진 ‘자본가’를 상징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틀라스는 할리우드식 영화 산업 아래 고통을 받는 인간을 표상한다. 할리우드의 노동력은 ‘자본’이라고 하는 거대한 상징계의 질서(혹은 ‘진리지점’)를 구축하기 위해 사용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바톤 핑크가 레슬링 영상을 참고할 때, 시선은 자본주의적 상징계의 질서 안에 있는 남근적 폭력으로 구체화된다. 바톤 핑크는 레슬링 각본을 만들라고 강요당한다. 레슬링은 남성의 육체성을 강조하는 스포츠이다. 레슬러들의 복장들에서는 팔루스(남근)가 적나라하게 튀어나와 있다. 레슬링은 문명화 단계 이전의 육체적 폭력과 팔루스를 회복하는 마초적 스포츠이다. 이는 거세공포가 도사리기 이전의 상상계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레슬링 선수들은 상대방의 팔루스를 제거하기 위해 서로를 공격하며, 동시에 자신의 팔루스를 강요한다. 바톤은 극장에서 영상을 보면서 끔찍한 표정을 짓는데, 그에게 있어 레슬링 영상은 상상계의 회귀로 작용하는 게 아니다. 바톤은 찰리 매도우와의 장난스러운 레슬링에서도 맥을 못 추는, ‘남성답지 않은’은 사람이며, 군인들 사이에서 자신이 작가라고 주장하다가 무력하게 얻어맞기만 하는 약골일 뿐이다. 군인들이 식당에서 서로 치고 받는 장면이 잠깐 주목되는데―배경이 2차 세계대전이라는 것을 염두 한다면―이는 전쟁의 축소판을 그려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쟁 또한 상대 진영을 지배하고 있는 상징적 팔루스(질서)를 거세하고 자신이 숭배라고 있는 팔루스를 강요한다. 상대를 거세하고 자신만의 팔루스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레슬링과 전쟁은 동일시된다. 그리하여 바톤은 레슬링 영상에서 가부장적 폭력성에 대한 공포, 거세공포를 경험하는 것이다. 레슬링 영화를 할리우드에서 대중적 영화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이유는, 가부장적 질서가 바로 자본주의를 만들어내는 질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필생의 역작을 들고 영화사를 찾아간 바톤 핑크가 퇴짜를 맞는 장면에서 이 시대를 규정하고 있는 두 진리 지점이 결합된다. 자본주의적 상징계의 질서를 표방하는 캐피틀 영화사 사무실에서, 사장은 남성적 폭력의 상징인 군복을 입고 있다. 그리고 ‘보통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바톤 핑크의 원고 따윈 쓰레기라고 주장하면서, 바톤을 군기피자라 비하를 한다. 그 원고는 자본주의로 표상되는 대타자의 욕망성에 포섭되지 않는,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원고이기 때문이다.

‘진리 지점’의 결합

자본주의적 상징계의 질서―팔루스에 완벽히 융합된 인간은 바로 저 가부장적 남성이다. 아니, 사장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질서를 상징하는 하나의 ‘팔루스’인 것이다.     



호텔, 창작의 공간



‘호텔’은 단순히 바톤 핑크가 숙박을 해결하는 공간이 아니라, 글을 쓰는 공간으로 형상화된다. 바톤 핑크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예술이 될 수 있다고 간절히 믿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독일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이성적 언어의 근원적인 폭력에서 해방을 가능케 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한다. 여기서 이성적 언어란, 사물을 계산적 합리성 속에서만 파악하게 만드는 언어이다. 사물이 이성적 언어의 도구로써 전락하는 과정은, 사물이 상징계의 영역에 편입되는 과정과 유사하다. 예술은 상징계의 질서 너머에 있는 ‘실재계’의 영역을 경험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하는 장르이다.


바톤 핑크의 예술적 목표는 할리우드라고 하는 거대한 자본주의적 상징계의 유혹에 의해 흔들리게 된다. 대타자의 욕망에 편승할 것인가? 아니면 예술을 창조할 것인가? 그리하여 창조의 공간인 글쓰기 공간은 다름 아닌 지옥으로 변모한다. 호텔 안에서 바톤 핑크의 창작을 방해하는 요건들은 어떤 정신적인 것들이 아니라, 성가신 모기, 옆방 여자의 신음, 남자의 거친 숨소리, 뜯어지는 벽지 등등 물질적인 것들이다. 방 안을 돌아다니는 모기라던 지, 뜯어지는 벽지는 바톤 핑크가 어쩔 수 없이 글에서 손을 떼게 만드는 작용인이지만, 여자와 남자의 거친 신음은 바톤 핑크가 글에서 눈을 거두고, 스스로 일어나서 벽에 귀를 대게 만드는 작용인이다. 바톤 핑크는 결국 레슬링 영화의 남성들처럼 되기를 소망하고, 존 메이휴의 아름다운 여성을 차지하고자 갈망하는 오이디푸스가 된다. 그리하여 바톤 핑크는 여비서와 하룻밤을 지낸다. 쇠파이프를 울릴 정도로 확대되는 남자와 여자의 거친 숨소리는, 일전의 바톤의 신경을 건드렸던 신음소리가 아니라, ‘팔루스 됨’을 희망하던 바톤이 ‘여성’을 획득함에서 오는 기쁨의 탄성이다.                      

바톤의 창작을 방해하는 '호텔'

하지만 이 ‘팔루스 됨’은 자본주의적 상징계 속에 완벽히 얽매이게 되는 것일 뿐, 예술가로 주체성을 회복함이 아니다. 게다가 그가 차지한 ‘여성’은 단지 남성의 입장에서 대상화되어 구성되어진 환상에 불과하다. 바톤 핑크는 일어나마자마 시체로 변모되어 있는 여비서를 보고는 비명을 지른다. ‘팔루스 됨’이 결국 허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그 자체로 충격적이다. 허구적인 ‘팔루스 됨’을 믿고 자기가 만든 ‘여성’의 환상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간은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예술로 승화시킬 수 없다.


‘팔루스 됨’의 허구성을 깨닫게 해주는 인물은 호텔 이웃 ‘찰리 매도우’이다. 찰리 매도우는 자신을 ‘보통 사람’이라고 여러 번 칭하기도 하고, 바톤 핑크가 직접 “저는 당신 같은 ‘보통 사람’에 대해 써요.”라고 하면서 찰리 매도우의 정체성을 ‘보통 사람’으로 규정짓는다. 그러나 정작 보통 사람의 이야기로 예술을 하고자 하는 바톤 핑크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찰리 매도우의 말을 무시한다. 그에게 있어서 “보통 사람의 예술”이란 단지 엘리트주의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마르크스 이전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계급 이데올로기를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도덕철학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했듯, 바톤 핑크 역시 엘리트주의적 기표에 둘러싸여서 진정한 ‘보통 사람’을 언표 할 수 없음에도 ‘보통 사람’을 이해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엘리트주의적 질서의 팔루스는 소설가 존 메이휴라는 인물로 형상화 되는데, 바톤 핑크가 존 메이휴라는 인물이 되고자 욕망하는 행위, 상징적 동일시하는 행위는, “‘보통 사람’의 예술을 하고 있다”는 착각으로 전이된다. 바톤핑크의 뒤틀린 욕망은 결국 ‘가부장 됨’, 즉 ‘팔루스 됨’ 그 자체로 변모한다. 엘리트주의적 허위의식은 두 단계로 나누어져 전복된다. 먼저 여비서가 존 메이휴의 소설을 대필해주고 있다고 고백함과 동시에, 엘리트주의적 기표로는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쓸 수 없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인식의 전환’이 시작되는 지점

두 번째는 찰리 매도우가 여비서를 죽임으로써, 그러니까 ‘여성’의 허구성을 해부해줌으로써, 여태 바톤이 지향해왔던 가치가 허위에 불과했음이  실토된다. 찰리 매도우는 전체주의적 기표까지 박살낸다. 발터 벤야민은 정치적 언어야 말로 ‘원죄’라 했다. 언어의 세계는 우주만큼의 가능성이 있는데, 언어가 정치의 도구가 되면 그 언어의 가능성은 몰락한다는 것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기표가 구조화될 때, 기표는 전체주의적인 기의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필생의 역작을 완성한 바톤 핑크에게 찾아온 독일계 형사와 이탈리아계 형사는 각각 나치즘과 파시즘을 연상시킨다. 그들이 바톤 핑크를 취조하는 방식은 마치 전체주의 사회 안에서 비밀경찰들이 무고한 시민을 폭압하는 행태와 일치된다. 심지어 그들은 바톤의 작품을 보고 “동성애적인 변태 작품”이라 말할 뿐이다.

전체주의적 기표를 산탄총으로 박살낸 '찰리 매도우'

형사들(기표를 전체주의적 구조로 통합하려는 세력)이 호텔(창작의 공간)에 무단으로 발을 들이자, 호텔은 금방 지옥같이 뜨거워진다. 전체주의적 기표로 해석된 텍스트―즉 오도된 텍스트―를 단서로 형사들이 바톤 핑크를 창작 공간(호텔)에서 잡아가려고 할 때, 찰리 매도우가 다시 나타난다. 찰리 매도우는 “나를 봐! 의식의 삶을 보여줄게!”라는 분노의 외침과 함께 달려와 형사들에게 엽총을 쏜다. 독일계 형사를 죽일 때는 “하일 히틀러”라고 말한다. “하일 히틀러”는 전체주의를 대표하는 기표이다. 찰리 매도우는 전체주의의 대표적 기표를 파괴함으로써 전체주의적 구조를 허물어트린다. “의식의 삶”이란, 전체주의의 폭압성이나 자본주의적 물화에 휘둘리지 않고, 실재계의 영역을 향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삶을 지시하는 것이다.


형사들과 레슬러, 그리고 영화사 사장은 이렇게 동일한 상징이 된다. 전쟁을 일으키려면 우선 군국주의적 전체주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전체주의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은 바로 가부장적 권력이다.                           



상자, 그리고 실재계


‘실재계’에 대한 갈망을 글로 해소하기

이러한 진리 지점을 상정하는 허위의식을 인식했다고 해서 바로 진정한 예술가가 되는 건 아니다. 예술가는 실재계를 경험하려는 부단한 노력 속에서 자기 예술세계를 구축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여비서 살해가 상징계의 질서 속에서 만들어진 허구적 여성상을 폭로한다면, 여비서의 머리가 들어있을 지도 모르는 ‘상자’는 실재계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여진다. 찰리 메도우가 ‘보통 사람’으로 인식되었을 때, 상자는 단지 이웃의 친절한 선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찰리 메도우가 살인마임이 밝혀지자, 상자 안에 여비서의 잘려나간 머리가 들어있을지 모른다는 혼란이 엄습한다. 이는 마치 편지봉투 안의 내용물이 누가 보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편지봉투를 열어보기 전에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상자 안에 든 것 또한 무엇인지는 절대로 알 수 없다. 상자 속 내용물은 상징계의 질서로써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무엇, 상징계의 질서 너머에 있는 무엇이 된다. 그리하여 바톤 핑크에게는 실재계에 대한 진정한 갈망이 주어진다. 이러한 갈망은 글쓰기로 해소되어지고, 바톤은 그토록 갈망하던 진정한 명필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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