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봄날의 기억
아직은 매서운 바람이 때 없이 찾아드는 삼월의 끝자락에서 그녀를 만났다. 살아가다 보면 처음 본 사람인데도 전생에 수많은 인연이 오고 간 것처럼 소통이 잘되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학교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며 적지 않은 나이에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낮 밤을 아주 바쁘게 사는 그녀지만 지친 기색 없이 자신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걷는 그녀가 아름다웠다. 그녀는 어느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사부작 거리며 내 인생으로 들어왔다.
그녀와의 만남은 늘 짧아서 아쉽다. 한 시간을 만나도 반나절을 만나도, 아쉬움은 언제나 같기만 하다. 우리의 소통은 어찌나 즐거운지 잠시의 쉴 틈도 없다. 그 자잘한 재미에 빠져든 나는 그녀의 점심시간으로 들어가는 날이 잦아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을 위해 들어선 식당은 단아하고 화사했다. 현관 오른쪽에 꾸밈 공간을 따로 만들어 수많은 소품들로 가득 채웠다. 선반 밑에 프리지어 꽃들이 봄빛을 받아 그 노란빛을 사방에 퍼트리고 있었다.
“ 프리지어의 꽃말은 천진무구래요, 봄꽃 중에는 프리지어가 제일 예뻐요. 향도 좋구요”
활짝 웃는 그녀의 미소가 프리지어를 닮았다. 문득 그녀의 미소를 내 방 창가에 가져다 놓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데려다 주는 길에 살짝 잡은 손에서 메마름이 스쳤다. 그녀의 손은 미소만큼 부드럽지 않았다. 하루 종일 책과 함께 하며 종이에 시달린 그녀의 손이 안타까웠다. 그녀의 거칠은 손이 화사한 미소를 닮기를 바라며 말했다.
“핸드크림 사 줄까요?”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핸드크림 수시로 바르고 있어요, 손바닥이 거친 것은 집안 내력 이예요”
거침없이 화사하게 웃는 그녀 옆에서, 나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그녀의 손바닥처럼 웃었다. 그녀를 바래다주고 망설임 없이 꽃집으로 향했다. 꽃집은 한가롭게 비어있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주인은 오지 않았다. 다른 집을 찾아봐야 될 것 같아 발길을 돌리려는 나를 사로잡은 것은, 냉장고 속의 노란 프리지어 꽃들 이었다. 둘러보니 주인의 핸드폰 번호만이 유리문에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통화속의 꽃집여자는 당당했다.
“오늘 제사여서 문만 열어두고 왔어요. 필요한 만큼 가져가시고 돈은 서랍에 넣어 두시면 되요”
별다른 안내문구도 없이 문을 열어둔 꽃집여자의 꽃들이 믿음직스러웠다.
알려 준대로 비닐봉지를 꺼내서 프리지어 두 단을 나누어서 싸매고 문을 나서는데 꽃집여자와의 통화내용이 떠올랐다.
“가끔 비워두는데 꽃을 사실 분들은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전화를 해요”
꽃집여자의 여유로운 마음이 꽃처럼 풍성했다.
가는 길에 그녀에게 들려서 프리지어 한 다발을 전했다. 꽃을 받은 그녀의 미소가 아까보다 더 프리지어를 닮아 있었다. 이제 내 정서적 기억에서 프리지어는 그녀의 화사한 미소로 기억 될것이고, 나는 프리지어의 향기와 그 봄날의 꽃집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