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온다
예술가는 모방하지 않는다. 변형한다.
—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저는 이 책을 통해 '유동하지 않는 사고는 죽은 사고'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문해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고를 유동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질문’입니다. 오늘 자녀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 중에 네가 무언가를 배운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걸 이야기해 볼래?" 이 질문은 매일 학교를 마치고, 하원하는 길에 제가 정말 즐겨하는 질문입니다. 6학년 첫째가 어느 날 답했습니다. "직육면체의 부피는 가로 곱하기 세로 곱하기 높이야"라며 배웠던 것을 생각하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아이가 추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질문법을 사용해 직육면체의 본질에 접근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동적 사고를 통해 추상적 문해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추상(抽象)'이란 어떤 대상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본질을 뽑아내 파악하는 정신의 작용입니다. 즉, 이것은 지성이 아니라 문해력이 필요한 정신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한자어 그대로 '추(抽)'는 '뽑아내다', '상(象)'은 '모양'이나 '형태'를 뜻합니다. 문자 그대로는 '형태(본질)를 뽑아낸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다면 직육면체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먼저 추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실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는 '구체(具體/Concrete)'에 접근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배운 직육면체를 보면 일상에서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게 뭘까?”
아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합니다.
“택배상자!”
저는 제가 우체국에서 가장 즐겨 쓰는 우체국 택배상자 2호의 치수를 검색하며 질문을 이어갑니다.
“우리 눈앞에 택배상자가 없지만 상상해 보자. 가로 27cm, 세로 18cm, 높이 15cm의 상자가 있어. 이걸 네 방에 가득 채운다고 하면 몇 개가 들어갈까?”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하더니 말했습니다.
“100개 정도?”
저도 어림잡아 계산을 하며 답했습니다.
“아니야. 4,000개는 거뜬히 들어갈 거야.”
박스라는 작은 직육면체를 방이라는 커다란 직육면체에 넣을 때 추상적인 접근을 통해 관념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주 단순하게 방의 구석에 접을 찍고, 3차원 직교 좌표계(x, y, z 축)를 그려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육면체를 진정으로 배웠다고 한다면 거실의 구석으로부터 3차원 좌표계가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직육면체는 '테셀레이션(Tessellation)', 즉 빈틈없이 공간을 완벽하게 채울 수 있는 유일한 3차원 기본 도형입니다. 구슬이나 깡통(원기둥)을 상자에 담으면 반드시 빈 공간이 생기지만, 벽돌, 책, 컨테이너 박스는 빈틈없이 쌓을 수 있습니다. 직육면체의 본질은 바로 '효율성'과 '표준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우체국의 박스 크기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교과서에 있는 문장을 그대로 읊조릴 때 박수 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이가 그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하기를, 다른 맥락에 적용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니체는 "사유는 변형을 통해 창조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한 문장은 문해력의 본질을 꿰뚫는 핵심입니다. 문해력이란 단순히 문자를 해독하고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읽은 것을, 들은 것을, 경험한 것을 다른 형태로 변환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야기를 그림으로, 소리를 글로, 감정을 은유로 바꿀 수 있는 힘, 바로 이것이 AI시대에 우리가 길러야 할 진정한 문해력의 핵심입니다.
연금술사들이 꿈꾼 변형의 원리
중세의 연금술사들은 납을 금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시도를 실패한 과학의 유물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심리학자 칼 융은 연금술의 진정한 의미가 물질의 변환이 아니라 '정신의 변환'에 있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연금술사들은 물질을 다루는 과정을 통해 실제로는 자신의 의식을 변환시키고 있었습니다. 불순물을 제거하고, 정제하고, 재조합하는 과정은 사유의 과정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유의 연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환의 과정입니다. 원재료(정보, 경험, 감각)를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만의 사유 과정 속에서 정제하고, 전혀 다른 형태로 재탄생시키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처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를 다시 쓰는 행위이며, 의미를 재창조하는 과정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정육면체 이야기와 같은 맥락입니다.
추상화, 세계를 압축하는 기술
변환의 가장 첫 단추는 추상화(Abstracting)입니다. 추상화란 복잡한 현실에서 본질적 요소만을 추출해 내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마치 조각가가 대리석 덩어리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어 형상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상은 이미 돌 속에 있다. 나는 단지 그것을 가두고 있는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할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추상을 위한 핵심은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일상은 무수한 정보로 넘쳐납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들기까지, 우리는 수천 가지 감각 자극과 정보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고, 의미화하고, 사유할 수 있는 것은 그중 극히 일부입니다. 뇌는 자동으로 정보를 선별하고 압축하고 추상화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에게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해력의 관점에서 추상화란 텍스트의 핵심을 포착하는 능력입니다. 긴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 복잡한 논증에서 핵심 주장을 뽑아내는 것, 여러 사건들 사이에서 공통된 패턴을 발견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추상화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줄이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국의 교육 현장에서 우리는 종종 추상화를 '요약'으로만 가르칩니다. "이 글의 중심 내용을 세 문장으로 요약하시오." 이것은 추상화의 매우 초보적 형태입니다. 진정한 추상화는 형태의 변환을 동반합니다. 이야기를 도표로 만드는 것, 논증을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하는 것, 감정의 흐름을 곡선으로 그려내는 것,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단순히 내용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인지적 차원으로 정보를 변환하는 것입니다.
변환, 형태를 바꾸는 마법
추상화가 '줄이는' 기술이라면, 변환(Transforming)은 '바꾸는' 기술입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형태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와 효과를 낳습니다. 시인은 산문을 시로 변환하고, 영화감독은 소설을 영상으로 변환하며, 작곡가는 감정을 음악으로 변환합니다. 이러한 변환의 과정에서 원래의 의미는 보존되면서도 새로운 차원의 의미가 덧붙여집니다.
들뢰즈는 이것을 '생성(becoming)'이라고 불렀습니다. A가 B로 변환될 때, A도 B도 아닌 제3의 무언가가 생성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그림으로 변환될 때, 우리는 단순히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이야기도 그림도 아닌 새로운 의미의 장을 열게 됩니다. 소리가 글로 변환될 때, 청각적 경험은 시각적 기호로 번역되면서 원래 소리가 갖지 못했던 영속성과 분석 가능성을 얻게 됩니다.
저의 제자 중에는 감성이 넘치는 학생이 있습니다. 텍스트로만 가득한 역사 교과서가 너무 따분하고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복잡한 전쟁의 전개 과정이나 여러 인물의 이해관계가 얽힌 정치적 사건은 도무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학생은 이 '글'을 '그림'으로 변환하기로 했습니다. 교과서의 한 챕터를 읽고, 그 핵심 내용을 한 페이지짜리 '비주얼 싱킹'이나 '마인드맵'으로 다시 그려냈습니다. "이 인물은 왜 이런 결정을 했을까?"(감정/동기), "이 사건이 10년 뒤 저 사건에 어떻게 연결되지?"(인과관계), "이 조약에서 가장 이득을 본 세력은 누구일까?"(핵심 분석)
이것은 단순히 글을 요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텍스트를 인물 관계도, 화살표, 표정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학생은 흩어져 있던 사실들 사이의 '관계'와 '흐름'을 꿰뚫어 보게 되었습니다. 교과서를 10번 읽을 때보다, 한 번의 '그림 변환'을 통해 그 사건의 본질을 훨씬 깊게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변환의 힘입니다. 형식을 바꾸는 과정에서 내용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창조적 사유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감각 간 번역, 공감각적 사유의 가능성
인간의 감각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경과학자들은 우리의 뇌에서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정보가 통합되어 처리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숫자를 볼 때 색깔을 느끼고, 음악을 들을 때 형태를 보며, 단어를 읽을 때 맛을 경험합니다. 이것을 공감각(synesthesia)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공감각적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문해력의 관점에서 감각 간 변환은 매우 중요한 능력입니다. "이 소리를 색깔로 표현한다면?", "이 감정을 촉감으로 느낀다면?", "이 개념을 냄새로 상상한다면?" 이러한 질문들은 얼핏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유의 경로를 확장하고, 고정된 의미를 유동화하며,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러시아의 심리학자 루리야는 한 기억력 천재를 연구했습니다. 그 사람은 수십 페이지의 무작위 숫자를 순식간에 외웠고,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정확히 재현해 낼 수 있었습니다.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모든 숫자를 감각적 이미지로 변환했습니다. 1은 날씬하고 우아한 남자, 2는 활기찬 여자, 3은 우울한 사람… 이런 식으로 각 숫자를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이미지로 변환하여 기억했던 것입니다. 그에게 숫자는 추상적 기호가 아니라 살아있는 감각적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감각 간 변환의 기회를 충분히 주고 있습니까? 교과서의 내용을 그저 읽고, 외우고, 시험 답안에 적어내는 것으로 그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정한 문해력은 텍스트를 다감각적으로 경험하고, 그것을 자신의 감각 언어로 번역해 낼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AI와 인간, 변환의 차이
ChatGPT에게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 한국 배경의 단편소설로 다시 써줘"라고 요청하면, AI는 순식간에 그럴듯한 텍스트를 생성해 냅니다. 이것은 변환이 아닐까요?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AI는 입력된 정보를 다른 형태로 출력하는 데 매우 뛰어납니다. 텍스트를 이미지로, 이미지를 텍스트로,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변환하는 것이 AI의 주특기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AI의 변환은 '패턴의 재조합'입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에서 학습한 패턴을 바탕으로, 입력에 대해 통계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출력을 생성합니다. 반면 인간의 변환은 '새로운 문맥의 창조'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형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꾸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의 층위를 더합니다.
예를 들어, 백남준이 TV를 예술 작품으로 변환했을 때, 그는 단순히 TV의 외관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매스미디어'라는 문맥을 '예술'이라는 문맥으로, '수동적 수용'이라는 관계를 '능동적 대화'라는 관계로 변환했습니다. 이것은 AI가 할 수 없는 변환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환은 기존 패턴의 재조합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AI처럼 능숙하게 형태를 바꾸는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AI가 인간보다 훨씬 잘합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왜 변환하는가', '어떤 문맥에서 변환하는가', '변환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감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AI시대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유의 연금술입니다.
은유, 세계를 다시 이름 짓는 행위
변환의 가장 높은 형태는 은유(metaphor)입니다. 은유란 단순히 '비유적 표현'이 아닙니다. 인지언어학자 레이코프와 존슨은 『삶으로서의 은유』에서 은유가 우리의 사고 자체를 구조화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시간은 돈이다", "논쟁은 전쟁이다", "사랑은 여행이다" 같은 은유들은 단순한 말의 기교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형성합니다.
문해력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은유적 사고 능력입니다.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으로 번역할 수 있는 능력, 낯선 것을 익숙한 것으로,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변환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기교가 아닙니다. 과학자들도 끊임없이 은유를 사용합니다. "빛의 파동", "전자의 궤도", "우주의 팽창" 같은 표현들은 모두 은유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보이는 것의 언어를 빌려옵니다.
한 고등학생은 '우울증'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워했습니다. 교과서의 정의를 읽어도, 증상 목록을 외워도,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경험인지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윌리엄 스타이런의 『보이는 어둠』을 읽으면서, 작가가 우울증을 "영혼의 기상학", "의식의 한기", "마음의 동굴"로 은유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은유는 추상적 개념을 감각적 경험으로 변환하는 강력한 도구였던 것입니다.
일상 속 변환 훈련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아이들의 변환 능력을 키울 수 있을까요? 사유의 연금술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훈련 가능한 기술입니다. 다음은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들입니다.
우리가 가장 흔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바로 형태 전환 놀이입니다. 같은 내용을 다양한 형태로 표현해 보는 연습입니다.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로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림으로 그려보고, 짧은 시로 써보고, 몸짓으로 표현해 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서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이는 같은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 각 표현 방식이 갖는 고유한 강점을 깨닫게 됩니다.
두 번째로는 감각 전환 질문을 해보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이라는 질문에서 더 나아가, "이 감정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이 소리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이 개념을 냄새로 상상한다면?"처럼 감각을 넘나드는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정답이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고정된 사고의 경로를 벗어나, 새로운 연결을 시도해 보는 경험 자체입니다.
세 번째로는 역변환 도전입니다. 시를 산문으로, 그림을 글로, 음악을 이야기로 바꿔보는 연습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번역이 아닙니다. 각 매체가 갖는 고유한 특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다른 매체의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아이는 '형식과 내용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게 됩니다. 왜 어떤 것은 말로 하는 것이 더 적합하고, 어떤 것은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 더 효과적인지를 체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은유 만들기입니다.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이미지로 바꾸는 연습입니다. "행복이 음식이라면 어떤 음식일까?", "시간이 동물이라면 어떤 동물일까?", "수학이 색깔이라면 무슨 색일까?" 같은 질문을 통해 아이는 자신만의 개념 지도를 그려나갑니다. 중요한 것은 답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입니다.
이 네 가지 방법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놀이'의 관점입니다. 변환 훈련은 과제나 숙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답을 맞히는 시험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탐험하는 놀이가 되어야 합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산책하는 길에서, 자동차 안에서, 자연스럽게 던지는 질문 하나가 아이의 사유를 변환시킵니다. "오늘 하루를 날씨로 표현한다면?" 같은 가벼운 질문에서 시작하십시오. 아이가 웃으며 대답할 때, 그 순간 변환의 마법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변환하는 아이, 창조하는 아이
변환 능력이 뛰어난 아이는 어떤 모습일까요? 그 아이는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외우지 않습니다. 대신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합니다. 역사를 연대기로만 암기하지 않고 인물들 간의 관계도로 그려봅니다. 과학 개념을 공식으로만 기억하지 않고 일상의 현상으로 연결합니다. 문학 작품을 줄거리로만 정리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교차시킵니다.
이러한 아이는 새로운 정보를 접했을 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능동적으로 자신의 지식 체계 속에 편입시키고, 기존의 것과 연결하며, 때로는 기존 체계를 재구성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메타인지(metacognition)'의 핵심입니다. 자신의 사고 과정을 관찰하고, 조정하고, 발전시키는 능력입니다. 더 나아가 변환 능력은 창조성의 근간입니다. 피카소는 "예술가는 파괴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한 파괴는 바로 '변환'의 의미일 것입니다. 기존의 형태를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합니다. 세상을 놀라게 한 발명이나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브랜드들이 좋은 예입니다.
코코 샤넬이 이룬 패션 혁신은 새로운 옷의 '발명'이 아니라, 코르셋을 파괴하고 저지(jersey) 원단이나 남성복의 요소를 차용하여, 여성의 몸과 패션의 관계 자체를 '해방'으로 변환한 것이었습니다. 스타벅스가 이룬 혁신은 더 맛있는 커피의 '개발'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커피를 '단순 음료'에서 '문화적 경험'으로 변환시켰습니다. 집과 직장 사이의 '제3의 공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사람과 커피, 그리고 공간의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변환했습니다. 이케아(IKEA)의 혁신은 가구의 '발명'이 아닌, '유통 방식'의 변환에 있습니다. 그들은 '완성된 가구'를 파는 대신 '플랫팩(flat-pack)'을 팔았습니다. 이를 통해 '비싸고 무거운 가구'라는 개념을 '저렴하고 가벼우며 스스로 조립하는 디자인'으로 변환했고, 소비자와 가구의 관계를 '수동적 구매자'에서 '능동적 참여자'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러한 관계의 변환은 이제 라이프스타일을 넘어 생명의 본질 자체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21세기 가장 혁명적인 발명 중 하나로 꼽히는 유전자 가위 (CRISPR-Cas9)는 DNA를 자르고 붙이는 정교한 분자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유전자는 '읽기만 가능한(read-only)' 설계도, 즉 우리가 물려받고 바꿀 수 없는 운명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CRISPR는 유전자를 '읽고 쓰기가 가능한(read-write)' 편집 가능한 데이터로 변환시켰습니다. 이는 질병, 생명, 더 나아가 인간이라는 종(種)의 정의 자체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바꾸고 있습니다.
AI시대에 우리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닙니다. 정보는 이미 넘쳐납니다. 필요한 것은 그 정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환하고, 새로운 문맥에서 재해석하며, 전혀 예상치 못한 연결을 만들어내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유의 연금술이며, 대체 불가능한 인간만의 문해력입니다.
변환은 곧 생성이다
다시 연금술사의 비유로 돌아가 봅시다. 연금술사들이 진정으로 추구한 것은 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이었습니다. 현자의 돌은 모든 물질을 변환할 수 있는 능력을 상징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이들에게 길러주어야 할 것은 특정한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어떤 경험도 배움으로, 어떤 정보도 통찰로, 어떤 문제도 기회로 변환할 수 있는 '사유의 현자의 돌'입니다.
니체가 말한 "사유는 변형을 통해 창조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통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다시 만듭니다. 변환하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정보의 수용자에서 의미의 창조자가 됩니다. 읽는 자에서 쓰는 자로, 배우는 자에서 가르치는 자로, 모방하는 자에서 발명하는 자로 변화합니다.
여러분의 아이가 책을 읽고 "재미있었어요" 또는 "이해했어요"라고 말할 때,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십시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네 친구에게 어떻게 설명할 거니?", "이 장면이 음악이라면 어떤 느낌일까?", "주인공의 감정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같은 질문으로 아이를 변환의 세계로 초대하십시오. 처음에는 당황할 수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점차 아이는 이러한 질문들을 즐기게 될 것이며, 스스로 자신만의 변환을 시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아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문해력을 가진 존재가 됩니다. 문자를 해독하는 수준을 넘어, 세계를 읽고 쓰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장 소중한 능력입니다. 사유의 연금술, 생각을 변형하는 힘, 바로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