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이 2년 넘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때에, 지금 되돌아보니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첫 일 년을 어영부영 보내버렸던 신랑이, 카톡 사건 이후로 1년이 넘게 극단적으로 공부 시간을 늘려가며 최선을 다했기에 곧 합격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품었었다. 반면 신랑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다른 방법으로 서둘러 취직을 해서 가정에 도움이 되고 바닥에 떨어진 자신감을 끌어올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내 기대를 키워가느라고 신랑의 변해 버린 목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신랑이 공무원 시험을 포기했다는 것을.
신랑이 공무원 시험공부를 한 지 2년 7개월째 되던 2017년 7월, 00 광역시의 한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에 취직을 했다고 했다. 8급 일반직이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통보였다. 나는 뱃속에 6개월이 된 셋째 아이를 품고 있었다. 어떻게 말도 없이 취직을 한 것이냐고, 언제 면접을 보러 갔다 왔냐고, 너무 멀어서 안 된다고, 그냥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이나 매진하라고 말했다. 신랑은 너무 멀어서 허락을 해줄 것 같지 않아서 혼자 면접을 보고 왔다고 했다. 평상시처럼 아침에 가방을 메고 도서관에 나서며, 내가 “잘 다녀와.”라고 배웅을 했던 지난 날들 중에 하루는 혼자서 마음속으로 면접이 잘 되기를 빌며 양복을 챙겨 나갔었겠구나 상상했다. 셋째도 낳게 되는 마당이니 마음이 급했다고 했다. 자신감도 많이 떨어져서 얼른 어디에서라도 일을 하고 싶었다고도 했다. 셋째를 낳기 전에 시댁 옆으로 이사를 가면 자기가 없어도 육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고, 직장에 다니면서 저녁이면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것이고 1년 안에 합격할 테니 보내달라고 했다. 이미 마음속으로 여러 번 연습해서 속사포처럼 일련의 계획들이 쏟아져 나왔으리라. 신랑은 이미 취직이 된 것 자체에 엄청난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고,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당장 그만두겠다고 말하라고 할 때에도 그렇게 화를 내도 소용없다는 걸 알으라는 듯, 슬픈 연기를 하는 표정으로 어쩔 수 없지만 자기를 믿어주고 뽑아준 사람들을 위해 갈 거라고 했다. 우리는 그날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답답한 마음에 눈물이 나오고,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했다. 가장 큰 울분은 그동안 내가 신랑의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포기하고 참아왔던 많은 일상들이 보상받지 못할 허상으로 멀리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자기 자립형 사립고에서 근무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나온 거잖아. 그냥 사립고등학교도 아니고 자립형 사립고는 너무 힘든 곳이라는 거 알면서도 왜 또 그런 곳을 가려고 하는 거야? 거기 가서 늘 입버릇처럼 상사 욕하고, 힘들다고 제 명에 못 살겠다고 할 거야? 그때 나이 들어서 퇴사하면 어디로 갈 건데? 00 광역시면 2시간 거리야. 그렇게 먼데로 가면 나랑 애들은 어떻게 해? 내가 혼자서 애들을 다 보라고? 우리 애가 지금 5살, 2살이야. 막내가 뱃속에 있어. 나더러 혼자 애들 키우라고? 너무 무책임한 거야. 그러지 마. 사립고등학교면 옮기지도 못하고 평생 거기 있는 건데, 나 혼자 애들 클 때까지 다 키우라는 말이잖아. 왜 그래. 자기 공부 열심히 했잖아.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합격할 수 있다고. 내가 합격할 때까지 기다릴게. 나 괜찮아. 차라리 몇 년 더 버티면서 공무원 합격하고 가까이에서 함께 지내자.”
“나를 믿고 합격시켜준 건데, 어떻게 취소를 해. 우선 다니면서, 밤마다 도서관 가서 공무원 시험 준비할게. 1년 안에 합격할게. 진짜 나 믿어줘. 나 열심히 할게. 우리 부모님이 자기가 애들 키우는 것 많이 도와주실 거야. 우리 부모님 있는 곳으로 이사 가자. 미안해. 나 진짜 가고 싶어. 진짜 일하고 싶어.”
이미 일을 저질러 버렸고 나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떠날 테니 너는 아이들을 잘 돌보아라 하는 듯한 느낌을 벗어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날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결혼하고 집을 떠난 적은 처음이었다.
‘나를 선택하든, 00고로 출근을 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
나는 일주일 정도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며 출퇴근을 했었다. 일주일 동안 나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너무 슬프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신랑을 이해해보려고도 했으나, 아무래도 이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신랑은 얘기를 하자고, 제발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일주일 뒤 집으로 돌아가 보니, 큰 애와 작은 애가 없었다. 혼자 돌볼 수가 없어서 시댁에 맡겼다고 했다. 신랑은 못 보던 차를 보여주었다. 합격 소식을 듣고 시아버지가 바로 중고 소나타를 구해주셨다고 했다. 이미 새로운 학교로 며칠 동안 출근을 했다고도 했다. 학교가 좋다고, 사람들도 마음에 든다고, 우리 가족이 다 같이 학교 구경을 갔다가 00(광역시)에서 하룻밤 자고 놀고 오자고 했다. 내가 '이건 절대 안 된다'는 의미로 집을 나갔던 것이 그에겐 어떤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시댁에 가니 신랑이 취직한 것에 대해 내가 굉장히 많은 반대를 해서 갈등이 있었고, 며칠간 집을 나갔던 것을 알고 계셔서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시부모님은 어렵게 입을 떼어 나를 설득했다.
"00 이가 이제 곧 마흔이고 애도 셋인데, 언제까지 공무원 시험공부만 하겠어. 젊은이들이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데도 몇 년씩 공부해도 안 되는 시험이잖아."
"00 이도 며느리가 혼자 벌고 고생하는 거 아니까 마음도 불편했겠지. 그냥 가서 일하게 둬라. 우리가 애들 보는 건 도와줄게. 잘 된 거야. 취직이라도 했으니 얼마나 좋으냐. 사람은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살아야 돼."
'누가 보면 이몽룡이가 과거 급제해서 금의환향한 줄 알겠네.' 시댁 어르신들은 신랑을 구슬려 공무원 시험을 공부하라고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리 아들의 고생은 '이제 여기까지'라고 여기는 듯하다. 앞으로 있을 며느리의 고생은 안중에도 없었다. 시댁에서 나는 유일하게 신랑의 취직을 반기지 않는 사람이었고, 남의 집 잔치에 와서 재를 뿌리는 사람처럼 그들이 마음껏 기뻐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것이 아직도 한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