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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Mar 16. 2019

46. 콜롬비아, 어디까지 가봤니 ② 영화

2017. 7. 27. 칼리, 콜롬비아(D +171)

이피알레스에서 밤버스를 타고 11~12시간을 달리면 칼리(Santiago de Cali)에 도착한다. 작열하는 태양, 높게 뻗은 야자나무, 해 질 무렵 피처럼 빨갛게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 마침 우중충하던 날씨도 개고 또다시 열대로 돌아왔다. 다른 곳보다 쿠바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한동안 듣지 못했던 china(치나, 주로 동양 여자를 보고 아는 체 하는 말) 소리가 거리를 걸을 때마다 들려와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살사의 발생지라던가, 호스텔마다 무료 살사 강습이 열리고, 살사 교습소도 많고, 밤이면 살사 클럽도 요란한 칼리는 일명 '살사의 도시'다. 그리고 나는 이곳을 또한 이렇게 부르고 싶다. '영화의 도시'라고. 





도시 구경도 하루 이틀이면 충분하고, 살사를 제외하면 딱히 할 것이 없는 이 도시. 사실 날씨 좋고 할 일 없는 곳이야말로 여행자들에겐 더없이 빠져나오기 어려운 '개미지옥'이다. 얼마 전 남미로 여행 갔던 지인도 살사를 핑계로 칼리에서만 두 달을 넘게 머물렀다고 했다. 이젠 길거리 사람들의 '치나'라는 말도 위협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겠다, 여유로이 목적도 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할 일 없음을 만끽했다.  

그리고 뭔가 재밌는 것이 없을까 하던 그때 발견했다. 바로 영화박물관 '칼리우드(caliwood)'를 말이다. 



마침 내가 방문한 시간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온 직원이 모여들어 혼자 왔니, 어디서 왔니, 어떻게 왔니, 콜롬비아는 어떠니 하며 한참 동안 각종 안부를 확인하기 시작한다. 평소의 나였다면 그런 관심은 오지랖, 귀찮음, 과도한 질문, 뭐 그럴 텐데 여행지라선가 이 모든 게 다 호의 같고 친절함으로만 보인다. 그러고 보니 콜롬비아에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국경을 넘으면서부터 전체적으로 친절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박물관은 외관을 보고 생각보다 작다 싶었는데 안에서 보니 또 보기보다 넓다. 박물관을 돌아보며 설명을 듣는 투어는 만 페소. 영어와 스페인어에서 고를 수 있다는데 또다시 스페인어를 골랐고, 호기로운 선택과 다르게 영화에 대한 지식도 많지 않은 나는 당연하게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직 앳된 얼굴의 박물관 직원이 손짓과 눈빛을 더해가며 천천히 설명을 이어갔다. 


칼리우드 영화박물관 내부.


이곳 칼리는 콜롬비아 영화의 원동력이라는 칼리그룹이 자라난 도시. '칼리그룹'은 1970년대의 영화문화운동집단으로 현실 참여의식과 시네필적 감수성으로 콜롬비아 영화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2016년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콜롬비아 영화 특별전이 진행됐던 모양인데, 그때의 설명을 보니 칸, 베를린, 선댄스 등 주요 영화제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최근의 현대 중남미 영화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사실 콜롬비아, 아니 남미 영화는 전혀 아는 것이 없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떠올린 영화라면 그저 남미를 배경으로 하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와 '해피투게더' 정도. 왜 남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알면서, 남미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찾아볼 생각을 안 했던 걸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콜롬비아만 해도 다양한 영화 사조가 있었고, 어떤 시기를 이끌어 온 감독이 있었고 또 중요한 영화가 있었다. 나는 배우인지 감독인지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소장품 혹은 영화의 소품 일부를 모아놓은 곳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조금씩 들을 수 있었다. 


독특한 자기만의 색으로 콜롬비아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영화인 안드레스 카이세도.


사실 칼리우드에서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런 스토리보다는 어떤 역사에 가깝다. 일단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글씨나 목소리보다 내 눈에 보이는 건 빼곡하게 전시된 필름과 카메라, 영사기 등의 각종 영화 장비였으니.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수많은 것들을 보고 있자니 이 나라가 가진 영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느껴지는 것 같다. 온 벽에는 각종 영화 포스터가 도배되어 있고, 한쪽엔 시대를 지나오며 영화관의 의자가 바뀌는 것을 한 줄씩 떼다가 붙여놓고 그 변화를 볼 수 있도록 해놓은 모습도 꽤나 재밌다.  


거진 한 시간의 투어를 마치면 칼리우드에선 작은 영화 상영회가 열린다. 한쪽에 마련된 작은 상영관에 앉으니 소리부터 요란하게 영사기가 돌아가고, 곧 눈 앞에 오래된 필름 영화가 상영된다. 작품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 낡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화면도 작고 선명하지도 않지만 그 어느 때보다 흥미롭다. 


깔리우드의 작은 상영관과 여기에서 틀어준 영화.


풍채가 좋은 박물관 관장님은 한국 영화 중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최고로 꼽는다며 내게도 콜롬비아 영화 몇 편을 추천해줬다. 꼭 보리라 다짐한 그 영화들은 사실 아직도 다 보지 못했다. 찾기도 힘들뿐더러 자막이.... ㅜ 그리고 홍콩 SB(쇼 브라더스)사의 영화 원본 필름 1초 분량을 기념이라며 선물로 줬다. 무려 스페인어 자막이 찍혀있는 쿵후 영화다.


선물은 끝이 아니었다. 관장님은 건물을 나서는 나를 따라 나와선 마치 촬영 소품처럼 진열되어 있던 박물관 앞 멋진 클래식 오픈카에 타라고 했다. 칼리의 모던아트 박물관도 볼만하니 네가 가보았으면 좋겠다고, 데려다주겠다고 말이다.

양쪽으로 쭉쭉 뻗은 열대 나무가 무성한 도로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데 주변에선 모두 우리를 쳐다보고, 이거야 말로 정말 영화 속 한 장면이다. 마치 칼리 힙스터의 성지(?) 같았던 모던아트 박물관과 인근까지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노을까지 기가 막히다. 숙소에선 잊지 않고 살사 강습에 참여했는데 잘춘다고 칭찬도 받았다. 남미 영화의 중심지라는 칼리, 오늘은 그야말로 어떤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실컷 하루를 누리고 온 기분이다. 

\


나를 내려주고 사라지는 칼리우드 관장님과 노란색 오픈카.


저녁,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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