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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Aug 07. 2019

나이는 구십넷, 이름은 김복동

영화 <김복동>


이름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되기 충분한 영화. 그것도 돌아가실 때까지 끝끝내 일본에게 사과받지 못할 한 맺힌 결말에 대해 알고 있기에 사실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보아야만 했던 영화기도 했다. 영화 말미의 내레이션처럼, '김복동'을 기억하는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영화는 담담하게 김복동 여사의 고된 하루하루 여정을 쫓는다. 자기주장을 목청껏 높이는 한 운동가, 배시시 웃으며 장난을 치는 할머니, 때로는 걷기도 힘들 정도로 아픈 노인네, 그래도 또 일어나서 내가 할 일을 하러 가야겠다고 말하는 투쟁자. 굳이 그의 어떤 한 면모를 부각하려 하지 않고 또 억지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한 연출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담담해서일까, 나는 끝내 더 부끄러워졌고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의 여정을 조용히 뒤쫓는 이 영화는, 동시에 일본의 사죄를 받기 위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운동의 기록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피해 사실을 밝히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지만, 한번 밝히고 나자 김복동이었던 개인은 어느새 사라지고 '위안부 피해자'라는 이름만 남아 버렸다. 몇 년 간 그 굴레를 벗고 자신 개인으로 살아보려고도 했지만, 결국엔 다시 돌아와 최전방에 섰다. 너무나 확실한 증거이자 증인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시간만 흘러갔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악역에도 조연이 필요한 걸까, 위안부 피해자와 일본 정부의 지난한 싸움에서 가장 강력한 ‘우리 편’이 되었어야 할 한국 정부는 내내 앞장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좌절하게 만드는 또 다른 가해자가 되기를 서슴지 않았다.  



개인의 이름을 걸고 나온 이 다큐멘터리는 하지만 결코 개인이 될 수 없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회를 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최근 연일 뉴스를 장식하는 일본의 소녀상 전시 관련 이슈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자신이 소녀상이 되어 사진을 찍고 함께 뜻을 같이 하는 그 길의 여정에 김복동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보면 유난히 시대의 아픔이 온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그것은 모두 개인의 아픔으로 치환되어 개인이 해결해야 할 숙제로 미루어지곤 했다. 누군가는 그 안에서 좌절하고 쓰러지고 말았지만, 누군가는 끝까지 남아 싸웠다. 김복동 여사는 눈을 감기 전까지 자신 개인의 역사가 되어버린, 사실은 우리 사회 모두가 함께 치유하고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겨진 문제를 위해 싸웠다. 그리고 목소리 높여 외쳤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라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더 많이 더 오래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해 나갈 수 있도록. 더 큰 힘으로 뭉쳐 함께 싸워나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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