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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선 Nov 05. 2023

뉘른베르크의 사형 집행인, 망나니가 아닌 생각하는 인간

조엘 해링톤의 『뉘른베르크의 사형 집행인』



미국 벤더빌트 대학교의 독일사 교수인 조엘 해링톤이 쓴 『뉘른베르크의 사형 집행인- 16세기의 격동하는 삶과 죽음, 명예와 수치』(이지안 옮김, 마르코폴로, 2023)를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1588년부터 1617년까지 독일 뉘른베르크의 사형 집행인으로 살아온 프란츠 슈미트의 일기를 기초로 하여 단순한 ‘망나니’가 아닌 살아서 숨쉬고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사형 집행인을 다룬 책이다. 일단 내용이 흥미진진하다. 그 시대에 범죄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형벌이 가해졌는지, 종종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끔찍하고 잔진한 사형의 장면들도 소개된다. 슈미트(마이스터 프란츠)의 역할이 법원의 결정에 따라 교수형, 불태우기, 참수, 심지어 바퀴로 육체를 찢는 등 다양한 형태로 사형을 집행하는 일이었으니 그러하다.



슈미트는 사형 집행인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직업적 삶을 기록한 일기들을 남겼다. 그 첫번째 목록에는 거기에는 1573년부터 그가 집행한 모든 사형 사건들이, 두 번째 목록에는 1578년 이후 그가 관여한 모든 체벌, 즉 채찍질, 낙인, 그리고 손가락, 귀, 혀 등 신체 절단형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각 항목에는 범인의 이름과 직업, 고향은 물론 해당 범죄, 처형의 종류와 집행 장소에 관한 정보를 담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슈미트는 범인과 피해자에 대한 배경 정보, 당해 범죄 및 이전 범죄에 대한 자세한 정보, 그리고 때때로 사형 집행 전 마지막 시간이나 순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추가했다. 수십 개의 긴 단락에 사건 관련자에 대한 더 많은 정보와 다채로운 부연 설명을 제공하고 때로는 대화체를 삽입하여 특정한 핵심 장면을 재연출했다. 슈미트는 소름끼치는 무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저자는 “법정의 규탄, 죽음의 행진, 사형집행 자체가 삼위일체로 구성되어 마침내 신중하게 고안된 도덕적 드라마”를 무대 위에서 선보이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 책은 마치 미셸 푸코의 책들을 읽을 때 느끼던 흥미로움을 떠올리게 한다. 미시적이고 디테일한 기록들에 기초하여 거대한 통찰과 담론을 이끌어내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뜻밖에도 경건하고 금욕적인 한 가장을 만나게 된다. 슈미트는 자신이 봉사하는 존경받는 사회에서 배제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범죄자들과 폭력적인 간수들과 시간을 보내야 했다. 사실상 오랜 기간 고립되었으나 역설적으로 높은 수준의 사회적 지능을 갖춘 사형집행인은 그의 능력을 통해 훌륭한 직업적 성공을 이루고 자신을 억압하는 대중적 오명을 차츰 반전시킨다. 책 속에 등장하는 사형집행인은 감정 없는 짐승과는 거리가 멀다.

책에 나오는 슈미트의 일생은 사형 집행인의 굴레에서 벗어나 의사로서 모두에게 존경받는 삶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은퇴한 사형 집행인으로 삶을 마감하기를 거부한 칠순의 슈미트는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게 호소하는 편지를 써서 결국 자손대대로 이어지는 사형 집행인의 굴레를 벗어나게 된다. 그 시대에 망나니로 산다는 것은 성 밖에 거주하면서 자녀들도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온식구들이 교회의 예배에도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약 1만 5천명의 환자를 돌본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4백명의 목숨을 끊어냈지만 그 열 배 이상의 목숨을 살려낸 것이다. 슈미트는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뉘른베르크 시민으로 보낸 31년, 그리고 사법 집행과 의학 분야에 근무해온 일평생을 고려하여, 슈미트 가문의 이름을 복권하여 평생 짊어진 오명을 벗고 아들들에게 모든 명예로운 직업의 기회를 열어 달라고 겸허하게 요청했고 이러한 요청은 수용된다. 

저자의 시선은 단지 16세기 뉘렌베르크에 한정되지 않는다.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 프란츠의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먼 시대의 매혹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 시대와 우리 세계를 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이 해링톤 교수의 얘기이다. 현재적 관점에서 프란츠 슈미트의 삶을 서술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프란츠 슈미트의 시대인들이 21세기의 개인보다 잔인한 경향성에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노출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두려움, 증오, 연민에 대해 그들보다 더하다거나 덜하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다. 그토록 지척에서 범죄의 희생자들과 동일시했던 프란츠 슈미트가 인종 학살, 원자탄 투하, 전면전 등 상상하기 힘든 현대의 만행을 알게 된다면, 그리고 자신의 사회를 잔인하고 무정하다고 여기는 현대의 시선을 접하게 된다면 진실로 놀랄 것이다. 프란츠 시대의 형사 재판이 가혹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는 수년, 수십 년, 때로는 평생을 고립시키는 현대의 재판과 감옥 관념에 몸서리칠 것이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슈미트 시대의 끔찍한 사형 집행의 광경들에 놀라지만, 정작 슈미트가 21세기에 빚어지는 만행들을 안다면 그가 더 놀랄 것이라는 얘기이다.

“근세 유럽인 들은 인간의 폭력이나 잔인함, 개인적 또는 집단적 보복에 대한 독점권을 누린 것은 아니다. 살인율로만 따져 보면, 프란츠 슈미트의 세계는 중세 세계의 선조들보다 덜 폭력적이었지만 (결코 자랑은 아니나) 현대 미국보다 더 폭력적이었다. 반면에 국가 폭력의 측면에서 본다면, 전근대 사회의 높은 사형률과 빈번한 군사 약탈은 20세기의 전쟁들, 정치적 숙청들, 대량 학살과 비교하면 오히려 미미한 수준이다.”

우리는 그 시대의 광경에 혐오를 느끼지만, 우리는 그 시대 이상의 혐오스러운 광경들을 보이는 세계를 살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저자가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는 그냥 흘려버릴 수가 없기에 깊은 여운을 남기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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