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일기
온화한 남자는 나의 첫 번째 이상형 조건이다. 나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고요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기가 세거나 너무 활기가 넘치는 사람과 오랜 시간 함께 하는 것이 어렵다.
MBTI를 굳이 언급하자면 I형인 나는 에너지가 내면으로 향하고 있어, 긴 수다에 취약하고 갑작스러운 계획과 제안에 당황한다.
"그런데 이다 씨, 온화한 사람이 남편감으로 좋다는 건 어느 정도 나이가 차야 알 수 있는 거거든. 보통은 반대의 남자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이다 씨는 20대 때 온화한 남자가 좋다는 생각을 했어? 신기하네."
H언니가 내게 물었다.
언니, 나는요, 과격하고 시끄럽고 목소리가 크고 감정이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바뀌는 사람을 잘 알거든요. 그 사람과 반대되는 사람을 찾으니 온화한 사람이던데요,
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다. 노래방에서 자꾸 마이크를 주는 사람도 질색이다. 술자리에서 빈 술잔에 계속 술을 따르며 자꾸 마시라고 채근하는 것도 정말 별로다. 집에 가는 길에 방향이 같으니 이 사람 저 사람 한 차에 타자고 몸을 구겨 넣는 것도 싫다.
노래는 내가 부를 때만 부르고 싶고, 술도 과음을 독촉하는 건 무섭고 거부감이 든다. 아무리 재미있는 모임이었어도 집에는 조용히 혼자 가고 싶다.
이런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용하다. 사회부적응자 수준이라 비난해도 할 말이 없을진대, 사람들은 나를 좋아해 줬고 나를 찾아주었다. 나와 여행을 가자 했고, 나와 치맥을 하자 했다.
그런데 나는 정신건강의학과에 가서 자주 말한다.
"선생님, 다음 주에 00 모임이 있는데 너무 가기 싫어요. 어떡해요. 그 생각만 하면 기분이 갑자기 가라앉아요."
"왜 가기 싫으세요?"
"별로 안 친한데 웃고 있는 것도 싫고, 공감 안 하는데 공감하는 척하는 것도 피곤해요."
"왜 공감하는 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안 그러면 그 사람이 속상할 거 아니에요?"
기승전-그 사람 속상할 게 걱정인 나다.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은 이런 광장공포와 불안, 초조를 달래줄 약을 처방해 주셨다. 필요하면 먹고 그렇지 않으면 안 먹어도 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선생님이 처방해 준 약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왠지 입안이 쓰다. 사람과 만나는 자리마저 거부하는 내 성격이 이내 못마땅해서다. 그 사람들이 내게 경기회복 계획을 세우란 것도 아니고, 보험 가입이나 물건 구매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장기자랑을 하란 것도 아닌데. 나는 왜 단체모임이 불편하고 싫을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데 아무래도 난 그냥 날짐승인 것만 같아 속이 좀 상했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그간의 일들을 말했다. 남편은 동요하지 않고, 내 감정에 전이되지도 않고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런 반응이 나를 안심시킨다.
토닥토닥. 잘했어. 괜찮을 거야.
여보가 하는 건 다 잘한 일이야.
남편의 단순한 몇 마디가 무릎 꺾인 나를 일으켜 세운다. 온화한 남자의 속은 단단하다. 여기저기에 휩쓸리지 않고 부정적인 감정에 물들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체로 그걸 잘 모르고선 내 남편을 착하기만 하다거나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볼 때가 종종 있다. 이 굳은 심지를 나만 알아서 아까울 때가 있고, 그래서 기쁠 때가 있으니 나도 참 우습다.
온화한 남자의 깊은 우물에 기대어 오늘 하루도 공포로부터 나를 지켜냈다. 다음 주에 있을 친목모임엔 약 없이도 갈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