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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죄책감 떠안은 영웅의 길

영화 '하얼빈' 리뷰

by J Hyun

'역사가 곧 스포일러'인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작품을 만드는 건 어렵다. 실제 역사 혹은 사건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면서 동시에 영화, 드라마 등 각색의 재미도 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이전에 수많은 작품에서 다뤘던 인물 이야기는 난이도는 더욱 높아진다.


이러한 리스크를 안고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소재화한 영화 '하얼빈'이 개봉했다. 이전에도 안중근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은 많았으나, 대부분 혹평을 면치 못했다.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동명 뮤지컬을 영화화한 '영웅'도 아쉬웠다. 그런 점에서 '하얼빈'은 안중근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중에서는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하얼빈'은 두 지점으로 나누며 '인간 안중근'을 조명한다. 첫 번째는 거사 1년 전인 1908년 신아산에서 독립군 대 일본군의 전투인데 매우 처절했다. 새하얀 눈과 진흙밭은 독립군-일본군이 뒤엉키며 싸우면서 흘린 빨간 피로 가득 채웠다. 궁극적으로 평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안중근은 승리 후 만국공법에 의거해 일본군 포로를 풀어줬으나, 이는 처절한 패배로 직결되어 실패한 얼굴을 드러낸다. 그로 인해 두려움과 죄책감을 떠안게 됐고, 그의 숨에서 공포가, 어둠으로 움츠리는 몸에서 죄책감이 느껴졌다.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현실은 안중근에게 신념과 의지를 꺾으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선택이 동료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결과를 계속 속삭이면서 말이다. 그런데도 안중근은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국 독립과 민족 번영을 이루기 위해 나아간다. 두려움과 죄책감을 안은 안중근이 동지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거사를 진행하는 7일 간 과정을 전개하는 데 이 부분이 두 번째 지점이다. 이들의 무겁고 고귀한 발걸음을 지켜보는 내내 뜨거운 애국심이 가슴속 깊숙한 곳부터 차오른다. 요즘 시국을 떠올리게 만드는 상황이나 대사로 인해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


안중근이 총을 쏘기까지 품고 있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물 탐구라는 점에서 기존 안중근을 소재로 한 작품들과 차별성을 띄고 있긴 하나, 쉽게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반복하는 듯 제자리를 오랫동안 맴돈다. 그래서 보는 관객에 따라 2시간도 안 되는 러닝타임이 유독 길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와 함께 '하얼빈'의 유일한 오락 요소(?)인 '밀정 찾기' 또한 호불호를 유발한다. 비슷한 설정을 지닌 영화 '밀정'과 비교한다면 정체를 추측하는 게 어렵지 않고, 서로 속고 속이는 과정 또한 짜임새가 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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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자들', '마약왕', '남산의 부장들' 등 욕망으로 가득 찬 악인을 중심으로 한 피카레스크 스타일 영화들을 선보여왔던 우민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와 비교한다면 '하얼빈'은 확실히 새롭다. 이번 작품에서 자극적인 연출을 줄이는 대신 건조하고 긴 호흡으로 차분하게 절제하는 도전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촬영을 위해 사용한 ARRI ALEXA 65 카메라의 영향력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월등히 높은 해상도와 넓은 화각을 자랑하는 카메라를 들고 6개월 간 몽골·라트비아·한국에서 촬영하면서 독립군의 주 활동 무대였던 중국 만주 일대 및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 지역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그러면서 바로크 양식의 회화를 연상케 하듯 명암을 극대화하고, 채도와 명도를 모두 낮추며, 컷을 최대한 길게 가져가고, 풍광을 적극 드러낸다. 안중근과 동지들의 마음, 그들이 내뿜는 기운, 그때 그 분위기들이 미술관에서 접했던 명작들처럼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하얼빈'에 출연한 배우들의 연기들도 훌륭하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안중근을 연기한 현빈이다.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면서 대중을 사로잡는 연기력을 펼치며 주목받아온 그지만, '하얼빈'에선 이보다 더 진한 임팩트를 선사한다. 국권 회복을 위해 단단하게, 또 담담하게 나아가는 장군의 면모뿐만 아니라 다양한 감정과 내면을 바탕으로 표현한 '인간 안중근'을 선보이며 극의 중심을 이끌어갔다.


특별출연으로 '하얼빈'에 합류한 이동욱도 인상 깊다. 대한의군 작전참모이자 안중근과 대립한 이창섭을 연기한 그는 용맹함 그 자체로 분하며 이번 작품에서 새로운 얼굴로 보여줬다. 더군다나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기 힘든 우민호 감독 연출작에서 그야말로 '미친 존재감'으로 관객들에게 제대로 각인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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