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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폼 시대에 역행한 마스터피스

영화 '브루탈리스트' 리뷰

by J Hyun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요즘 같은 시대에 매우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이 시대에 눈에 띄는 작품이다.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 및 골든글로브 3관왕(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저명한 시상식에서 수상해서가 아니라, 현재 트렌드로 각광받는 스타일과는 역행해 클래식을 고집하고 있어서다. 이 점이 신선하면서도 자신만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 완성도를 높인다.


'브루탈리스트'는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뒤 새 희망을 찾아 미국에 온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건축가 라슬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의 미국 정착기를 그린다.


헝가리 출신 유대인 건축가인 라슬로 토스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아내 에르제벳(펄리시티 존스)과 하나뿐인 조카 조피아(래피 캐시디)와 강제 이별하게 되면서 수용소에 끌려갔다. 전쟁은 끝난 뒤 그는 헤어지게 된 아내와 조카와 새로운 곳에 정착해 새출발하겠다는 염원을 안고 미국 땅을 밟는다. 하지만 이민자의 냉혹한 현실과 아직 치유되지 않은 전쟁의 상흔에 하루하루 견뎌내기 버거웠다. 그렇게 간간히 버텨가던 어느 날,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 밴 뷰렌(가이 피어스)의 제안을 받고 기념비적인 건축물 설계를 하게 된다.


이 영화는 영화 타이틀의 어원이 된 브루탈리즘(brutalism)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브루탈리즘은 20세기 중반을 대표했던 건축 양식으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행했던 모더니즘의 반작용으로 등장했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솔직함'이 핵심이며, 노출 콘크리트, 거대한 규모, 빛과 그림자로 대변된다.


주인공 라슬로는 브루탈리즘을 추구하는 건축가이며, 그가 해리슨의 제안을 받아 완성하려는 건축물 또한 브루탈리즘 양식이다. 이를 비추어 봤을 때 '브루탈리스트'는 당연히 라슬로를 의미하지만, 브루탈리즘이 추구하는 방향을 라슬로 인생을 빌드업하는 데에도 활용한다. 나아가 이민자의 아메리칸드림을 브루탈리즘 양식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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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슬로는 건설 현장 허드렛일이나 석탄 캐기, 건축 도면 그리는 일 따위도 불평 없이 받아들이나, 미국 사회는 '부다페스트에서 온 유대인 출신 이민자'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라슬로의 영어를 두고 '구두닦이'라고 폄하하고, 에르제벳이나 조피아의 이름을 제멋대로 미국식으로 부르는 점, 실어증에 걸린 조피아에게 입을 열라고 강요한다.


라슬로를 천재로 추앙하고 꿈을 펼쳐보라고 제안한 해리슨 밴 뷰렌은 적극적으로 그를 후원하며 좋은 사람처럼 보이나, 실상은 라슬로의 천재성을 이용해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려는 속셈이었다. 천재 건축가에게 모든 걸 일임하듯 말하면서 다른 건축가나 공사 감독관들을 고용해 그를 옥죄며 통제한다. 한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듯이. 밴 뷰렌 일가를 통해 미국 사회와 특권층의 오만함과 지적 허영심이 만들어낸 그림자도 드러난다. 미국 이민자의 예술성과 노동력으로 명성을 얻지만, 이민자들의 능력과 노고를 인정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소유인 양 통제하고 짓밟는다. 나치와 소련의 행태와 너무나도 닮아있다.


그러나 후세에 인정받은 건 오만한 가득한 미국 특권층이 아닌 라슬로가 지은 브루탈리즘 양식의 건축물이었다. 라슬로의 말처럼 전쟁에서도 살아남았고 침식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듯, 이민자에게 가해진 폭력을 견뎌냈다. 그와 그의 예술에 모욕을 주며 짓밟으려고 했던 해리슨은 사라졌고, 미완성으로 남은 센터는 건축 비엔날레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선정됐다. 라슬로의 건축물은 이민자 예술, 그리고 미국의 오만한 탄압과 그 탄압에서 견뎌낸 상징물인 셈이다.


전쟁의 상흔을 안고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이민자들, 전쟁 직후 급격한 패러다임 변화로 인해 부상한 미국의 유럽을 향한 열등감, 쇠퇴하는 유럽의 미국을 향한 자격지심 이외에도 어떠한 제약에도 굴하지 않는 라슬로-에르제벳 부부의 관계성과 사랑까지 압도적인 브루탈리즘 건축물 하나에 담아낸다. 여기에 비극과 애환으로 쌓아 올린 마스터피스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촬영과 음악도 인상적이다. 특히 음악들은 라슬로가 겪은 불안과 고통, 예술과 자본 사이에 상충하며 세워진 브루탈리즘을 대변한다.


주연을 맡은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브루탈리스트'에서 인생연기를 펼쳤다. 그에게 아카데미 역대 최연소 남우주연상 타이틀을 안겨줬던 '피아니스트'에 이어 다시 한번 홀로코스트 생존자 캐릭터인 라슬로 토스를 맡으면서 인간의 위대함과 나약함, 겸손과 오만, 위선과 위악은 물론이고 시대가 안겨준 고통과 그 고통이 유발한 트라우마를 한 곳에 응축해 표출한다. 이러한 구성을 바탕으로 15분 인터미션을 포함한 장시간 러닝타임(215분)으로 구성해 영화계, 아니 숏폼이 대세인 이 시대 흐름에 반항한다.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관객 및 시대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선사한다.


오는 3월 3일(한국시각 기준)에 열리는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브루탈리스트'는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을 포함해 총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이 작품이 몇 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리느냐도 중요하겠지만, 수상 여부를 떠나 영화의 클래식함으로 세상을 뒤흔든 것만으로도 '브루탈리스트'는 대단하다고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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