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 배틀 어나더 애프터' 리뷰
베를린, 칸, 베네치아 세계 3대 영화제를 석권한 '작가주의 거장' 폴 토마스 앤더슨(이하 PTA) 감독이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었다. 그동안 선보였던 작품 규모나 성향들을 고려한다면, 의외의 선택일 수 있으나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도 'PTA는 역시 PTA'였다. "정말 기가 막힌 영화"라고 극찬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평처럼, 훌륭한 완성도는 물론이겠거니와 씨네필을 넘어 일반 대중들도 편히 즐길 수 있게끔 장벽을 낮춰 대중성까지 갖췄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선 입소문이 나며 소소하게 역주행했던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토머스 핀천의 소설 '바인 랜드'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PTA 감독이 연출, 각본을 직접 맡았다. 최근 시네아스토로 분류될 수 있는 감독들과 협업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워너 브러더스의 지원을 받아 제작비만 1억 3000만 달러가 투입돼, PTA 감독의 작품들 중 역대 최대 규모다. 여기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비롯해 숀 펜, 베니시오 델 토로 등 굵직한 캐스팅 라인업까지 갖췄다.
영화는 16년 전 이야기로 시작된다. 프렌치 75는 미국 정부를 '제국주의 정권'이라 비판하며 수용소에 갇힌 이민자들을 구하고 낱개 금지법에 반대하는 의원실을 공격하고 은행을 터는 등 자유와 사랑을 외치는 지하 정치조직이다. 프렌치 75의 일원이자 '로켓 맨'으로 불리는 펫은 조직 내에서 폭발물 제조를 맡고 있다. 그는 같은 조직원 이자 급진적인 철학을 지닌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테야나 테일러)와 사랑에 빠졌고, 사랑과 혁명을 함께 나누던 둘 사이에 딸 샬린(체이스 인피니티)이 태어난다.
행복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의 가정생활에 문제가 발생한다. 작전 도중 퍼피디아에게 성적으로 모욕당하면서 생포됐던 군인 스티븐 J. 록조(숀 펜)가 그녀에게 성적 욕망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며, 정부의 프렌치 75 분쇄에 앞장선 것. 이로 인해 프렌치 75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조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펫은 퍼피디아 없이 홀로 샬린을 데리고 잠적했고, 두 사람은 밥과 윌라로 신분세탁한 채 살아간다. 16년 후, 록조는 은둔생활하던 밥과 윌라를 쫓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윌라가 납치된다. 밥은 딸을 구하기 위해 옛 동료들을 소집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PTA 감독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이야기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윌라는 록조에게 쫓기다 납치당하게 되고 딸과 헤어지게 된 밥은 윌라를 구하러 나서는데 영화 '테이큰' 시리즈와 비슷하다. 여기에 밥과 퍼피디아, 그리고 록조의 삼각관계가 더해지나, 기본 구조는 도망가고 쫓고 구하려는 추격진이다.
단순한 이야기는 밀도 높은 장면들로 속도감 있게 전개한다. 프렌치 75가 국경지대에 위치한 수용소에 침입해 이민자를 구하는 장면부터 퍼피디아가 경찰에 쫓기는 카체이싱 장면까지 16년 전 전사가 간결하면서도 강렬하게 영화의 전반부를 알린다. 이어 현재로 넘어와 밥과 록조, 윌라 세 인물의 시점으로 분할해 숨 가쁜 추격전을 펼친다. 단순한 목표를 향해 질주하듯 장면을 펼쳐놓는다는 점에서 PTA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펀치 드렁크 러브'를 연상케 한다.
PTA 감독의 영화적 '동지' 조니 그린우드(라디오헤드 기타리스트)의 강렬한 음악은 딸을 구하려는 아버지의 직관적인 추격 서사에 긴박감을 더한다. 감독 커리어 첫 도전한 아이맥스 촬영을 통해 익스트림 클로즈업, 롱테이크 트래킹 샷 등 시그니처와도 같은 장면들을 한층 업그레이드된 밀도와 스케일로 선사한다. 특히 후반부 3대의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달리는 추격 신은 CG를 사용하지 않고 파도처럼 상하로 요동치는 언덕 지형 도로에서 차선 변경 없이 펼쳐내는데 보는 이들로 입이 벌어지게 만든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또 다른 볼거리는 추격전이 펼쳐지는 주변 배경이다. 밥과 윌라 부녀가 은둔생활하는 레드우드 숲속의 오두막은 혁명의 실패가 남긴 잔해를 상징한다. 혁명의 실패자가 된 밥은 그 여파로 대마와 술에 찌든 편집증 환자가 된다. 그가 '알제리 전투'를 시청하는 장면은 과거에 갇힌 세대의 무력감을 상징한다. 그러면서 딸에게 스마트폰을 멀리하게 하며 언제든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심어주는데, 이는 세대 간 단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한편 윌라는 과거의 혁명의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아버지와 이로 인해 엉망진창이 된 가정의 무게를 떠안고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는 상태. 그는 이 혼란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나가는데 이 부분이 영화의 핵심이자 상징이다. 윌라는 역사를 배우면서도 현재의 위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데, 이는 부녀의 분리와 재결합을 통해 세대 간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게 만든다.
한 가족의 비극과 세대 간 단절만 담고 있는 게 아니다. 저항 조직인 프렌치 75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이 사용한 75밀리 야포에서 착안했는데, 발사 속도가 빠르고 정밀해 혁신적 무기로 불렸던 야포처럼 격렬하고 무력적인 저항의 상징을 담고 있다. 또한 록조 대령이 프렌치 75를 제압해 입회하려고 하는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은 일루미나티와 KKK를 동시에 연상시키는 백인 우월주의 집단이다. 과거 미국의 인종 간 결혼 금지법 같은 제도적 차별이 무너진 지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편견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러한 풍자는 오늘날 미국 사회의 모습을 거침없이 들춰낸다. 이민자 수용소의 높다란 벽과 이민자를 단속하는 경찰들의 모습, 다른 인종을 향해 혐오를 드러내는 백인 우월주의자 클럽은 여러모로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를 부르짖는 트럼프 정권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백인 우월주의자를 우스꽝스럽게 그리는 한편, 밥-윌라 부녀와 이민자들의 연대는 매력적으로 표현하며 사랑과 자유를 향한 찬가를 전달한다.
영화 속 다양한 메시지, 상징들이 관객에게 쉽게 전달될 수 있는 데에는 배우들의 열연이 크다. 딸의 탄생 이후 혁명 정신을 잊은 채 방탕하게 살던 밥 역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역시!'라는 감탄사에 적합한 명연기를 펼친다. 특유의 허당기는 물론, 웃기면서도 가슴 울리는 연기는 말이 필요없다. 특히 혁명가의 목숨줄과도 같은 조직의 암호를 까먹고 조직원에게 욕설을 토해내는 장면이나 실수를 계속 연발하는 면모는 강렬하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대척점에 서 있는 록조 역의 숀 펜 역시 훌륭한 에너미 아치로서 역할을 해낸다. 겉으로는 유색 인종을 혐오하면서도 흑인 여성에 대한 성적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마초 군인의 모습을 소름 끼치게 표현한다. 밥과 대조적으로 목표 달성을 위해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맹렬하게 몰아붙이는 기계 같은 이미지 대비는 관객들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숀 펜, 두 배우가 내년 오스카 후보에 나란히 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그 외 밥 부녀를 돕는 든든한 존재이자 느긋함이 묻어나는 세르지오 세인트 카를로스 역의 베니시오 델 토로, 영화 전반부 퍼피디아 역으로 제대로 눈도장 찍은 테야나 테일러, 그리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로 스크린 데뷔하는 체이스 인피니티 등도 제 몫 이상을 해낸다.
미국 현지에선 개봉 직후,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강력한 아카데미상 후보로 각광받고 있다. 그만큼, 어디 하나 부족함 없이 훌륭한 완성도를 자랑함과 동시에 관객들의 몰입도를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유독 아카데미 상복이 없는 PTA가 이번 작품으로 오스카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