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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랑 Jan 28. 2023

다섯 가지 비

같은 하늘 같은 비는 없다


 자정 가까이 시작된 땅을 때리는 듯 떨어지는 굵은 비. 마른땅을 적당히 적셔 줄 옅은 비는 모두에게 반갑지만 다음 날까지 빠르고 느리기를 반복할 뿐 그치지 않는 비는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습기를 먹게 해 무거워진다. 빛이 나올 틈 없이 하늘을 덮은 비 먹은 구름이 많아질수록 낮과 밤을 구별할 수없이 어두워진다. 오늘은 어두움이 곧 무거움이 된다.


 R는 지난밤 강하게 내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깬다. 몽롱한 정신에 ‘비가 내리네’라고 생각하며 금방 다시 잠이 든다. 몇 시간 후 평소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눈이 떠진다. 바깥은 어둡고 잠결에 들은 빗소리가 여전히 들린다. 빗소리 말고는 어떤 소리도 없는 공간에 비 내리는 날씨가 주는 차가운 공기가 창문 틈으로 밀려와 몸에 닿는 이불을 더 끌어당기게 만든다. 덜 깬 잠과 아침 기분을 느낄 수 없어 몸이 나른하다. 부드러운 느낌을 당장 걷어낼 필요 없는 R는 조금 더 이 상태로 있기로 한다. 적극적으로 이불에 몸을 파묻고 일정한 듯 아닌 듯 들려오는 빗소리로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에 맞서지 않고 내려오게 둔다.


 A는 장거리 출근을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어젯밤 잠들기 전 들려오는 빗소리에 아침에는 제발 그치길 바랐건만 그의 바람을 비웃는 듯 더욱 억세게 내리는 비다. 어찌나 억센지 아파트 출입구에서 잠시 멈춰 내리는 비를 바라본다. 이내 큰 숨을 들이마시고 우산을 펴 비 속으로 들어간다. 버스정류장까지 5분. 그 사이 신발과 옷의 몇 부분이 물을 먹어 색이 달라졌다. 우산을 접어 있는 힘껏 탈탈 털지만 흐르는 물줄기가 또 다른 물줄기를 만들어 낼 뿐이다. 출발도 전에 움직이는 것이 무겁다. 버스가 오기 전까지 버스정류장 지붕으로 떨어지는 빗소리와 차도에 만들어진 물웅덩이가 커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의 마음과 달리 비는 시원하게 온다고 생각한 A이다. 저 멀리 버스가 들어온다. 버스 바퀴로 튀는 물을 맞지 않기 위해 한발 물러선다. 이런 마음을 알아챘는지 천천히 버스를 인도 가까이에 정차한다. 덕분에 A는 우산을 다시 펴지 않고 무사히 버스 위로 올라탄다. 이런 날씨에 일터에 가기 위해, 이미 일터인 사람끼리 나누는 동지애일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자리 앉자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의 비 속으로 출발하는 버스. 해가 나지 않은 이른 아침, 버스도착정보 전광판 빛이 유난히 밝은 버스정류장에 어떤 마음이 작게 일렁인다.


 I는 점심 식사 후 할 일 없이 방 안에 누워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느낀 지루함에 시계를 확인한다. 하루에 절반밖에 지나지 않은 것이 놀랍기만 하다. 당장 몸을 일으켜 친구에게 연락을 한다. 친구도 그와 같은 마음인지 답장이 빠르다. 어디서 만날지 고민하던 중 이야기를 나눌수록 청소년인 우리가 갈 만한 장소가 마땅히 없다는 것에 힘이 빠진다. 그렇게 서로 아무 말 없다가 '바깥에서 비 맞고 놀아볼까’ 가볍게 던지는 친구다. 우리는 일단 우산을 들고 나왔다. 서로 우물쭈물 눈치를 본다. 길에는 사람이 없지만 어쩐지 비를 맞고 노는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럽다. 하지만 이미 신발과 바지단이 엉망인 것이 우산으로 이 많은 비를 막지 못한 다는 것을 눈빛 교환으로 말한 뒤 우산을 내던진다. 크게 내뱉는 우리의 목소리는 세차게 내리는 비와 같이 땅으로 떨어진다. 물에 닿아 무거워지는 옷과 다르게 우리는 뭔지 모를 해방감을 느낀다. 생각보다 더 즐거운 우리는 신발 던지기를 하며 길을 걸어간다. 차가운 공기에 오래 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돈도 들지 않고 고민할 필요 없는 장소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크게 웃었다. 빗소리에 웃음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없지만 길에서 마음껏 소리 지르고 웃어 본 처음이자 아직까지 마지막인 시간. 그래 우리는 돈을 내고 어느 곳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지. 계속 바깥으로 나아가자고 생각하는 I와 친구이다.


 N는 약속까지 시간이 남아 카페에 있기로 한다. 보통 비가 아닌지 평소에 사람으로 붐비던 길과 가게가 한산하다. 이렇게 텅 빈 모습이 어색하지만 조용한 분위기가 반갑기도 하다. 카페에 사람이 오랜만에 오는지 직원도 사람을 귀찮아하지 않고 오히려 반기는 모습이다.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 조금 거리가 있는 창가를 본다. 지나가는 어떤 것도 없이 위에서 떨어지는 것뿐이다. 잠시 뒤 커피를 받아 아까와 비슷하게 창가와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는다. 다시 반복적인 창밖에 상황을 보고 있으니 일렁이는 불을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다. 어떤 생각도 감정도 들지 않고 그저 무(無)인 상태가 유지된다. 몸의 안과 밖이 시끄러울 것 없이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잠시 뒤에 있을 약속이 방해가 된다. 조금 시간이 남아 있으니 괜찮다며 남은 시간을 적극적으로 무(無)인 상태에 빠진다. 작게 들려오는 카페 안 음악 소리, 고소하게 올라오는 커피 냄새, 그리고 방해하지 말라는 그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곧 만날 상대에게 온 문자에 N은 가만히 웃는다.


 Y는 창문 앞에 앉아 소란스러운 밖을 한참 내다보고 있다. 지금쯤 반려인간과 저 길을 걷고 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왜인지 나갈 생각이 없는 반려인간이 이상하다. 창문과 자신을 번갈아 보는 나에게 “오늘은 안 돼. 비가 너무 많이 와. 내일 가자.” 외치는 반려인간이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집에만 있을 생각을 하니 슬프다. 나는 다시 종일 위에서 떨어지는 무언가를 본다. 그때 입맛을 돋우는 냄새가 코에 닿는다. 냄새가 나는 곳을 서둘러 가니 반려인간이 바쁘다. 나는 앞발을 일으켜 반려인간이 바쁘게 만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내려와 자리를 잡는다. 그는 “기다려. 조금 식혀서 줄게.”하며 그것을 후후 불기도 손부채질을 하는데 그럴수록 나의 코는 더 크게 벌렁 인다. 드디어 접시를 가지고 평소 내가 밥 먹는 곳에 앉아 나를 부른다. 준비된 고기를 꿀떡꿀떡 먹는 나를 보며 그가 무게가 느껴지는 투로 말한다. “우비로 저 비를 막을 수 없어. 내일 아침 일찍 나가자.” 맛있는 것을 주는 걸 보면 바깥에 가득한 저것은 좋은 건가 생각하는 귀여운 Y. 따뜻해진 배가 졸음을 불러온다. Y는 뒷정리를 마치고 앉아 뜨개질하는 반려인간 허벅지에 엉덩이를 대고 누워 잠이 든다. 반려인간의 살과 Y의 털이 닿아 더 높아지는 온도가 더 깊은 잠을 부른다.


 하루가 지나 다시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 하늘에 구멍이 난 듯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더 이상 뱉어낼 것이 없어 보이는 홀쭉한 구름이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화단의 땅은 패어지고 길에는 물이 가득 찬 웅덩이가 걸을 때마다 따라온다. 강한 비를 이겨내고 나뭇가지에 잘 붙어 있는 감과 빗물을 털어내는 고양이를 보고 있으니 길 위에 있는 모두가 누구보다 긴 하루를 보낸 것이 느껴진다. 어쩌다 안 좋은 날씨를 만나는 사람과 다르게 어둡고 무거운 날을 매일 맞이하고 있는 길 위의 따뜻한 이들. 내일은 더 높아진 하늘이 구름에 방해받지 않고 맘껏 뿜어내는 햇볕을 받아 털에 남아 있는 물기와 고단함이 함께 증발되길 바란다. 언제나 발에 부드럽게 닿는 흙과 풀 위에서 볕을 잔뜩 받으며 나른한 시간을 보내는 모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한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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