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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캣 Oct 16. 2018

영구보존중인 카스테라

카스테라 - 박민규

6. 카스테라 – 박민규

 

2005년 발표된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처음 읽는다. 한창 인기몰이중인 베스트셀러라 하기에는 이미 13년이나 지났고, 그렇다고 한국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 읽어야 할 고전 이라기에는 아직 13년 밖에 되지 않은, 그야말로 숙성도가 애매한 작품이다. 수록된 단편의 제목들을 먼저 살펴 본다. 카스테라는 그렇다 치고, 너구리까지는 또 그렇다 치고, 이어서 등장하는 기린, 개복치, 펠리컨, 오징어, 헤드락, 야쿠르트 아줌마.. 역시 그때 ‘삼미 슈퍼스타즈’를 읽지 않기 잘했어, 라는 생각이 스쳤다.


대표작이자 첫 작품인 ‘카스테라’를 먼저 읽는다. 자취방 냉장고에 뭔가를 자꾸 집어넣는 대학생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책이었다가, 다음엔 부모님, 학교, 동사무소, 신문사.. 그러다가 결국 미국과 중국까지 집어넣고, 학교가 없어져 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세기가 바뀐 첫 날 평소와 달리 고요해진 냉장고에 놀라 문을 연 순간, 그때까지 집어넣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선반에 카스테라 한 조각이 하얗고 깨끗한 접시 위에 놓여있더라는 얘기였다. 


카스테라는 그렇다 치고, 다음 작품은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다. 정규직 전환을 위해 분투하는 인턴 사원이 등장한다. 생각해보면 늘 다크 서클을 달고 사는 직장인들을 너구리에 비유하곤 했었다. 각고의 노력으로 정규직이 되면 그 대가로 다크 서클을 획득하고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스테이지 23을 조심해야 한다. 과연 너구리였다.


그 순간이 온 건, 제목만으로는 가장 기대치가 낮았던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에서였다. 


‘잭필드 4색 3종 선택 면바지 세트를 구입한 사회학과의 선배는, 마침 그중 베이지컬러를 골라입으며 이렇게 얘기했다. 아무래도 자본주의는 ’39,800원’이 아닐까 싶어. 나는 요새 왜 자본주의는 ’40,200원’이 될 수 없을까, 에 대해 골몰히 생각중이야.’


문장이 특별해서라기 보다는 그 문장이 너무 낯익은 게 문제였다. ‘잭필드’는 지금의 ‘무이자’만큼이나 한때 케이블TV를 지배했던 단어가 아닌가. 어느덧 나는 마들렌 한 조각을 통해 열 살 무렵으로 돌아간 마르셀처럼,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다시 소파에 누워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자다 깨길 반복하던 어느 일요일 무렵으로 돌아갔다. 


2천년대 초반의 단어들이다. 세기말, 뉴 밀레니엄, 호프집, 편의점 알바, 주유소 알바, 지하철 푸시맨, 잭필드 3종 세트, 상업 고등학교, 오락실, 오리배, 두더지 잡기, 야쿠르트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소년중앙, 헤드락, 헐크 호건, 고시원.. 어떤 것은 사라졌고, 어떤 것은 남아있으며, 또 어떤 것들은 사라져가고 있다. 15년에서 20년이면 세상이 바뀌기 충분한 시간이구나, 상념에 빠져있을 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쿠르트 아줌마에요.’


그제서야 작가가 말하는 카스테라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어른이 된다는 것, 가게에서 흔히 파는 걸 쉽게 사먹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사는 대로, 어른들이 살아야 한다고 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소중한 것과, 하찮은 것 모두를 자기 방식대로 반죽하고 구워 자기만의 카스테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진짜 어른이 되는 것 아닐까 묻는 작가의 질문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도 다른 의미에서 한 조각의 카스테라인 것 같다. 2천년대 초반을 살았던 어떤 젊은이가 그 시대를 감싸고 있던 온갖 것들을 정성껏 반죽해 한 조각의 멋진 카스테라로 만들어냈다. 주어진 상황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고, 바라보고 묵묵히 받아들이는 주인공들의 태도가 인상 깊었다. 작가는 자기만의 카스테라를 만들어 보자고 말하지만, 박민규의 카스테라만큼은 냉장고에 영구 보존되어 있으니 한번쯤 간편하게 사먹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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