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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캣 Oct 18. 2018

카프카의 성으로

성 - 프란츠 카프카

7. 성 – 프란츠 카프카

 

늦은 저녁시간이었다. 눈 속에 깊이 잠긴 마을에 허름한 차림의 사내가 찾아 든다. 여관 주인은 낯선 이의 출현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자신을 성에서 초빙한 토지측량사라고 소개하는 사내의 태도는 사뭇 당당하다. 


프란츠 카프카는 1883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아직 체코라는 나라가 생기기 전이었던 당시의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 프라하였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의 지배층과 체코어를 쓰는 다수로 구성된 보헤미아 왕국에서, 독일어를 쓰는 유태인 중산층 출신이라는 카프카의 위치는 미묘했다. 상류층에서 보기에는 유태인이었고, 체코인 입장에서는 독일어 사용자였으며, 유태인 사회에서는 종교와 거리를 두는 일종의 배신자였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카프카는 마치 ‘이방인’같다라고 표현했다. 알제리에서 태어났지만 아랍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본토 프랑스인도 아니었던 알베르 카뮈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그랬던 것처럼.



카프카의 ‘성’을 꼭 읽어야겠다 결심하게 된 것도 카뮈 덕분이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 부록으로 수록된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속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에서 카프카의 작품을 이렇게 설명한다. ‘소송은 문제를 제기하고 성은 어느 정도까지 그 문제를 해결한다…. 소송은 진단을 내리고 성은 치료한다. 그러나 여기서 처방한 약은 병을 낫게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병이 정상적인 삶 속으로 되돌아가게 할 뿐이다. 그것은 병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카프카가 어떤 처방을 내렸는지 알아보려면 일단 읽어야 할 텐데, 그게 결코 쉽지 않다. 카프카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성’은 분량도 분량이지만, 모호한 내용의 반복으로 읽는 이를 지치게 하는데다, 심지어 미완성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하지만 ‘성에 가고자 하지만 끝내 성에 이르지 못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성에 이르는 길을 모색하는 사내의 이야기’라는 걸 알고 – 기대감을 접고 – 펼치면 또 어느 정도까지는 읽을만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것도 부조리라면 부조리겠지만.


성으로 향하는 주인공 요제프 K는 집요하다. 성을 향해 걷다가 길을 잃기도 하고, 단지 성주 베스트베스트 백작의 비서인 클람의 애인이라는 이유로 여관에서 일하는 프리다에게 호감을 갖고 접근하기도 한다. 성의 심부름꾼인 바르나바스는 클람에게 자신의 편지를 전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K는 클람을 만나기 위해 마차에서 몰래 기다리다가 심문을 받기도 한다. 


프리다나 바르나바스를 비롯 한때 클람의 애인이었던 여관 주인 아말리아나 촌장등 K가 기대했던 사람들은 K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심지어 성으로 향하는 K의 의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대한 K의 무모하고 건방진 도전이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군,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며 읽다 보니 문득 한가지 의문이 든다. 과연 K는 토지측량사이기는 한가? 자신을 토지측량사라 소개하고 심지어 성에서 자격을 인정받기도 하지만 K가 토지측량사라는 증거는 한가지도 제시되지 않는다. 측량 도구도 지니고 있지 않고, 그에 대한 대화도 없으며, 토지측량이라는 걸 시도조차 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K가 성에 가려는 이유도 매우 불분명한데, 단지 성에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클람을 만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K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는 K자신도 모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성에 가서 클람을 만나면 그저 모든 문제가, 그가 알지 못하는 문제까지도, 전부 해결되겠지 하는 식이다. K의 소망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대사처럼 일종의 기도였거나, 혹은 막연한 탄원에 불과한 걸까.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에게는 막연한 기대의 대상인 고도보다 그를 기다리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 모두의 삶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그 하루에서 어떤 의미를 구하고 찾아야 할까. 카뮈는 약속을 지켰다. 비록 ‘어느 정도’이기는 하지만 카프카는 어느 정도 해결책을 제시한 것 같다. 병을 낫게 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유일한 처방임은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시지프 신화’ 1,2부는 ‘소송’과 ‘성’의 해설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제프 K가 ‘소송’에서처럼 무기력하게 쓰러지지 않아 다행이다. 



https://youtu.be/bAOKBVWzdV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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