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안다 -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인도 출신의 예수회 신부 앤소니 드 멜로는 다음의 우화를 이야기한다. 한 여인이 중병에 걸려 생사를 헤매는데 아득한 곳에서 어떤 음성이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쿠퍼 부인으로 이 시의 시장 아내입니다."
"나는 너의 이름이나 남편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사랑하는 두 아들의 엄마입니다."
"네가 누구의 엄마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나는 네 직업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기독교인이며, 남편을 잘 내조했고,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여인은 알 수 없는 음성과의 대화 후 병에서 회복되었고, 그 후 삶이 달라졌다. 자신이 규정 지은 한정된 나에게서 벗어나 더 역동적인 존재로 살게 된 것이다.
류시화, <나의 품사에 대하여 중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실은 나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안다는 것도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 일.
가을이 시작되는 2020년 9월 어느 날 우리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함께 읽었다.
내가 소유한 것이 곧 나라는 존재와 같다면, 소유한 것을 잃었을 때의 나는 누구일까? 그릇된 생활 방식의 증인으로서 좌절과 무력감에 휩싸인 가련한 존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나는 갖고 있는 것을 언제든 잃을 수 있기 때문에 갖고 있는 것을 잃게 될 거라고 늘 걱정하게 마련이다. 도둑을, 경제적 변동을, 혁명을, 병을, 죽음을 두려워하고 사랑을, 자유를, 성장을, 변화를, 미지의 것을 두려워한다. 이리하여 만성 우울증에 걸려 건강을 잃을 뿐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다른 것들도 잃을까 두려워 끊임없이 걱정하게 된다. 또한 자기를 좀 더 잘 지키기 위해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 때문에 방어 태세를 취하게 되며, 고집스러워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외로워진다. 헨리크 입센은 그의 작품 『페르 귄트』에서 이런 자기중심적 인물을 멋지게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자기 일만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는 주인공은 극단적인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욕망덩어리인 자신이 곧 자기 존재라고 믿는다. 임종에 이르러 그는 소유 중심의 생활 때문에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었다고, 자기는 알맹이가 없는 양파에 불과했다고, 한 번도 자기 자신인 적 없는 미완성된 인간이었다고 시인한다.
가진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에서 생기는 걱정과 불안은 존재 양식에는 없다. 만일 내가 ‘존재하는 나’이고, 소유하고 있는 내가 아니라면, 아무도 내 안정감과 주체성을 빼앗거나 위협할 수 없다. 나의 중심은 내 안에 있다. 나의 존재 능력과 자신의 본질적인 힘을 표현하는 능력은 내 성격 구조의 일부이며, 그것을 좌우하는 사람은 나다. 이것은 정상적인 삶의 과정에 꼭 들어맞는다. 물론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병이나 고문, 그 밖의 강력한 외적 제한의 경우에는 꼭 들어맞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中>
내가 소유한 것이 곧 나라는 존재와 같다면, 소유한 것을 잃었을 때의 나는 누구일까?라는 에리히 프롬의 질문은 강하게 다가왔다. 이제껏 나를 규정하는 많은 것들이 실은 내가 아니었을 수 있다는 깨달음. 진짜 나, 존재하는 나를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그냥 소유하는 나의 모습에 파묻혀 살아간다면 인생의 진짜 참 맛을 누려다보지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진짜 나를 발견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또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각자의 방식으로 ‘나’라는 존재에 대해여 글을 썼다.
18세 주윤재
태어나서 머리털이 자라고 내 스스로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을 즈음부터 나는 늘 무언가를 가지고 싶어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남들이 가지고 있는 장난감을 나도 가지고 싶다는 소유욕이 생겼고 부모님께 사달라며 떼를 쓴 기억이 있다. 중학생때는 외모에 관심이 생겨 날 꾸밀 수 있는 옷 따위를 그렇게 가지고 싶어 난리를 친 기억이 있다. 그 당시에는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단지 남에게 잘보이고 싶은 발버둥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와서 생각을 하면 참 이상한 것들이 많다. 분명 그 순간에는 가장 소중하고, 간절하고 또 무엇보다 사랑했던 많은 것들이 지금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 어떤 것이 변한 것일까 내가 바뀐 것일까 세상이 바뀐 것일까. 이것도 내가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일까 <후략>
18세, 박성수
나는 무엇일까? 나는 어찌하여 존재하는가? 나는 이러한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 나라는 존재는 과연 태어난 김에 사는 것인가. 아니면 존재의 의미를 살아가며 만들어 갈 것인가 하는 고민을 이번 기회에 생각하게 되었다. 고학년이 되고 나는 태권도 선수를 꿈꿨다. 겨루기를 하며 싸우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가락이 심하게 부서져 운동을 포기해야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게임만 했다. 공부는 소홀히 하여도 성적이 그리 나쁘지 않아서 매일 매일 게임에 매진하였다. 게임으로 하루를 새는 것은 비일비재 하였고 주말 내내 방에서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러다 중3이 되어 럭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고 싶던 운동이었고 격렬하게 부딪히고 힘을 겨루는 것이 좋았고 재미있었다. 그러나 부상은 항상 내 발목을 잡았다. <중략>
나답게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즐기는 것이다. 모든 상황을 즐기고 최대한 화내지 않으려 한다.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럭비를 하면서 다섯번의 큰 부상이 있었다. 그래도 이겨내고 계속하고 지금도 럭비를 즐기며 하고 있다. 나는 즐기며 살고 싶고 웃으며 사는 것이 나의 존재의 이유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일까? 나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며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다. 후회될 것은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경험이라고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산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 그 자체인 것 같다.
18세 김영현
자신의 생활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매순간 자신을 합리화하는 과정이고 사회에서의 인간의 본능이다. 이 두 전제를 깨닫기 전에는 누구에게나 완벽해보이는 사람이라는 이상적인 인물상이고 싶었다. 그리고 이분법적으로 다른 모든 이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제일 이상적인 것이고 그것이 아닌 것은 안 좋은 것으로 생각했다. <중략> 부자는 단순히 돈이 많다고, 돈으로부터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부자가 아니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생각, 독립된 인격이어야 부자가 된다. 나는 돈, 명예, 종교, 학벌, 우정, 사랑 등 나로부터의 모든 것에 연연하지 않는 마음가짐,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이 ‘자신’을 ‘존재’시킨다는 것을 믿는다.
하나의 글이 시작점이 되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우리는 자신들에 대해서 조금은 박하게 평가를 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반듯하고 모범적인 학생일수록 오히려 자신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평가를 내린다. 부족한 부분에 집중하여 스스로를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어쨌든 우리 모두는 진지하게 자신을 들여다보았고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떻게 살고자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바라보며 자신만의 빛들을 발견해간다. 반짝이는 그들이 나누어준 진지한 성찰의 결과물들이 정말로 고맙다.
나를 잘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