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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Jul 07. 2015

시가 있는 오후

시끌벅적한 오전이 지나고

가게가 월요일이 휴무이다보니 다른 사람들의 화요일이 나에겐 월요일과 같다. 덕분에 월요병이 나에겐 화요병이다.


조금 나른하고, 조금은 가라앉는 화요일.

시끌벅적하게 손님들이 다녀가고 내 자리에 앉아 어제 산 시집을 펼쳐들었다. 돈통이 보이는 생계의 자리에서 낭만의 끄트머리라도 붙잡아보려고 펼쳐든 시집이지만 시집은 시집의 무게 만큼 묵직했다.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내가 처음 만나는 그녀의 시다.


나는 그녀를 소설가로 먼저 알았는데 사실,그녀의 소설은 한 번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그녀가 묘사하는 섬세한 그로데스크함, 그 문장들의 결에 감당할 수 없이 마음이 버거워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점에서 그녀의 시집을 발견하고 정말이지 반가운 마음으로 망설임 없이 그것을 골라나온 건, 팔할은 시집 표지에 그려진 그녀의 섬세하고도 거친 옆모습 때문이었다. 그녀의 책에 실린 그녀의 모습들은 늘 나에게 무엇인지 모를 기대를 주곤 했는데 그녀를 그린 그림 역시 그랬다.


표지에 그려진 그녀의 옆 모습을 젖혀 책장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내 마음에 들어 온 시는 <마크로스코와 나 -2월의 죽음> 이었다. 짐작컨대 마크로스코의 마지막 작품 레드를 마주하고 난 후 쓴 시가 아닐까 싶었다.


마크로스코의 레드.

그 붉은 빛 속에서 한강은 손목을 그어 죽은 그와 언어도 빛도 눈물도 모르는 채 붉은 자궁에 맺혀있던 자기를 마주했나 보았다. 죽음과 생명 사이의 틈에서 온전히 그를 만났나 보았다.


그녀의 시는 날카롭게 아픔을 겨누어, 애써 덮어 두었던 기억들을 헤집어내고 다시 잠잠하게 했다. 나는 헤집어진 기억들을 다시 내 속으로 개켜 넣으며 그녀가 마크로스코를 상상했듯 그녀를 상상했다.


시인으로서의 그녀는 때때로 섬세함으로 세상의 모든 감정에 귀기울이는 기쁨을 얻은 대신 무딘 가슴으로 세상의 슬픔에 무던할 수 있는 삶을 잃은 듯 보이곤 한다.


하지만 그녀의 날 선 감성의 일렁임은 일상의 무딤 속에 서 있던 나에게 아프고 저리고 기뻤던 섬세한 나를 발견하게 하고 내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음 확인하게 한다.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음이 견디기 어려운날, 한강의 시집을 펼쳐 언제라도 다시 위로 받을 수 있을 거란 사실에 감사하게 되는 오후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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