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7
멀리를 다녀올 일이 있어 아침부터 부지런을 좀 떨었다. 내가 정한 약속 날짜인데 일어나 보니 갑자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주일도 넘게 맑더니 왜 하필 오늘. 나는 비를 싫어한다. 늘 가방이 무겁기 때문에 손에 우산같이 번외의 무언가를 더 들고 다니는 게 싫어서이기도 하고, 비가 내린 뒤 특유의 비린내가 싫어서이기도 하다. 내 멋대로 약속 시간이나 날짜를 바꿀 수도 있었지만 빗속을 걷는 짜증보다 일상을 비집어 낸 새로움이 오늘은 더 좋을 것 같았다. 비타민D 수치가 심하게 낮다는 진단을 받은 다음이라 괜히 피로감이 더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밤사이 파스로 달랜 왼쪽 어깨도 좀 낫는가 싶더니 근육통과 함께 더 찌릿했다. 그래도 일단 현관문을 닫았다.
대중교통 or 차. 가는 길의 교통편이 애매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고민했다. 몇 번이나 갈아타고 가서 또 한참 걸어야 하는 대중교통과, 초행길인 데다 내비게이션 상으로도 이미 꽉 막히고 있는 도로로 가야 하는 차. 그중에 후자를 택한 건 순전히 비를 맞기 싫어서였다. 결정했으니 중간에 예상보다 더 길이 막히더라도 후회 말자하고 차로 달려갔는데 앞에 이중주차가 되어 있었다. 우리 아파트 단지는 주차난이 아주 심하다. 요리조리 좁은 공간을 지나 단지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미션이지만 당장 이중 주차되어 있는 차를 밀어내는 것부터가 행선지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차를 밀 때마다 기억나는 날이 있다. 어느 날 수업하러 가려고 나섰는데 우리 차 앞에 가구회사 트럭이 주차되어 있었다. 일요일 아침 8시 아파트 단지는 인적이 드물다. 트럭엔 큰 가구가 여럿 실려 있었다. 적당한 크기의 승용차도 바닥 기울기와 방향에 따라 혼자 밀기 어려운 때가 있는데 이건 그냥 불가능한 미션 같았다. 낑낑대며 힘을 써보는 동안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나는 고민했다. 이제는 당장 출발해야 하고, 택시로 가면 너무 비싸고, 차 주인에게 전화하자니 좀 무섭고, 깊게 자고 있는 남편은 전화로 일어날 리 없고, 경비 아저씨께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하러 가기에는 좀 먼 위치였다. 그때 나는 "이걸 지금 못 밀면 이 수업 잘린다"라고 생각을 했다. 내 튼튼한 종아리에 힘을 실어 어깨와 허리로 힘껏 밀었다. 트럭이 아니라 바닥을 발로 밀어낸다는 느낌으로. 사람이 급하면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 결과는 인간승리. 밀어내려고 민 건 맞는데 진짜로 차가 밀려서 조금 당황했다. 그땐 기뻐할 새도 없이 바로 출발을 했다. 나중에 돌이켜 보니 곱씹을수록 그날의 내가 대단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무용담도 몇 번 늘어놨었다.
성취의 기억은 또 다른 성취를 낳는다. 학습 및 훈련의 기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당연히 중형 승용차쯤은 거뜬하니까 이중 주차된 차를 힘주어 밀었다. 예전보다 몸집도 커져서 당연히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인간 패배. 남의 차는 꿈쩍을 안 했다. 약간 내리막인 바닥에 있기도 했고 보닛 앞쪽에서 뒤로 미는 방향이라 힘이 실리지 않았다. 아무리 용을 써도 내 발만 미끄러졌다. 왼쪽 무릎이 빗물에 젖었다. 보닛 가장자리에 눌린 손바닥도 너무 아팠다. 차라리 트럭이었으면 판판해서 밀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구시렁 구시렁. 결국 난 뒷 좌석에 넣어뒀던 가방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지하철역으로 빠르게 걸었다.
평일 낮에 바깥에 다니면 늘 느끼는 거지만 사람이 참 많다. 출퇴근 시간에만 사람이 많은 게 아니다. 첫 번째 노선에서는 자리가 있어서 앉았고, 길게 타고 가야 하는 두 번째 노선에서는 서서 갔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금방 내릴 때가 됐다. 비는 안 오고 하늘은 우중충했다. 바람이 세게 불었고 손이 시렸다. 목적지를 향해 지도 어플을 보며 걷는데 거리가 꽤 됐다. 조금만 더 가면 다음 지하철 역이 나올 것만 같을 때쯤 목적지에 도착했다. 은행부터 해서 여러 회사가 들어서 있는 빌딩이었다. 높은 데서 한참 만에 온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려야 할 곳에 잘 내렸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내 이름이 불렸다. 나밖에 방문하기로 한 사람이 없었는지 얼굴도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담당자가 바로 알아봐 주었다.
남편은 내가 어디 모르는 데서 도움을 요청하거나 가게에서 주문을 하거나 할 때 쭈구리 같다고 했다. 나는 공손하게 한다고 하는 가성 섞인 말투인데 목소리가 작아서 되게 소심하고 뭐 잘못한 사람 같단다. 그 후로 목소리를 좀 크게 하려고 노력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개방형 책상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사람 앞에 앉으니 옆에 있는 사람들이 신경 쓰여 저절로 속삭이게 되었다. 열댓 명 되는 직원들이 말없이 다 내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가장 뒤에는 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벽을 등지고 모니터에 얼굴을 숨긴 채 앉아 있었다. 흡사 판옵티콘 같았다. 팀장은 모든 모니터를 볼 수 있고 직원들은 자신이 감시를 당하는지 아닌지조차도 알 수 없이 늘 누군가의 시선이 뒤통수에 있겠거니 여겨야만 하는 구조였다. 파티션 없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회사원들이 더 일찍 죽는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나의 담당자는 내내 웃었지만 난 그의 목숨이 걱정되었다. 누가 보든 말든 괘념치 않을 수 있는 패기 있는 요즘 젊은이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게다가 그곳에 외부인은 오로지 나 하나였다. 내가 쭈구리가 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캐릭터는 다음에 바꾸기로 하고, 용건은 15분도 안 돼서 끝냈다.
안녕히 가시라는 말에 서둘러 엉덩이를 뗐다. 담당자가 얼음까지 넣어 건네준 차를 두 모금밖에 마시지 못했는데. 내가 이러려고 한 시간 반을 왔나 자괴감이 들려고 했지만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맘만 먹으면 환승까지도 할 수 있는 상황. 그래도 근처에 머물기로 했다. 일단은 다시 엘리베이터. 이번엔 빨리 왔다. 나는 이미 타고 있던 사람들 앞에 섰다. 다음 층에서 몇 명이 더 타니 가운데에 서게 됐다. 내 앞엔 세 명이 있었다. 높은 자리에 있음 직한 분께서 누군가에 관한 불만을 토로하셨다. 옆에 같이 탄 직원은 상사의 날 선 말을 달래며 조마조마해했다. 그는 나중에 말씀하시라며 상사의 등과 어깨를 감쌌다. 상사는 자기도 안다고 하며 말을 멈췄다. 정황 상 내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소속된 회사의, 혹은 그와 관련된 회사의 오너를 까는 모양이었다. 기업도 브랜드도 잘 모르는 내가 들어도 누군지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사람. 내 앞에 서 있던 상사와 직원들을 제치고 내가 먼저 내렸다. 상사의 평가에 동의하는 마음을 품으면서.
추웠다. 배도 고팠다. 왼쪽에 있는 창고형 마트로 갈까 오른쪽에 있는 일반 대형마트로 갈까 고민하다 핫도그가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곳은 내가 자주 가는 옆 동네 지점과는 달리 구조가 특이했다. 1층에서 입구로 들어갔는데 푸드코트가 없었다. 갑자기 상품 진열대를 만나 당황했다. 입장은 무료 퇴장은 유료인가. 어차피 회원이라 잘못 들어섰어도 문제는 없었지만 눈치를 보며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익숙한 음식 간판 앞으로 다가섰는데 웬 입간판이 대기줄 옆에 세워져 있었다. 이 지점에서는 음식을 테이크아웃만 한단다.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먹는 속도도 느린데 그 앞에서 꾸역꾸역 먹는다? 이 무거운 가방에 긴 우산에 핫도그와 음료수를 손에 다 들고? 이건 아니었다. 소득 없이 밖으로 나왔다.
배고픔은 잠시 미뤄 뒀다. 관심 두고 있던 전시회를 보러 가려고 설레는 동네로 가는 버스를 탔다. 아주 즉흥이었다. 단순하게 기분이 엄청 좋아졌다. 예정된 저녁 수업 전까지 시간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마음도 편했다. 강을 질러 다리를 건너는 동안 하늘은 여전히 뿌옜다. 바퀴 위에 있는 자리에 앉았더니 허리를 숙이고 옆으로 고갤 돌려야 하늘이 보였다. 여전히 사람은 많았다.
전시회장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평일의 축복이다. 컨베이어 벨트 탄 것처럼 다 같이 줄줄 걸어가는 주말의 전시회는 그 걸음의 속도만큼 휙 지나가고 만다. 더 무거워진 가방과 우산은 잠시 프런트에 맡겼다. 덕분에 내 걸음대로 내 속도대로 온전히 글과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어두운 장막 사이로 많은 것들이 환히 보였다. 짤막하게, 아무도 못 알아볼 흔적을 방명록에 남겼다. 관람을 끝내고 작가 한 분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수줍게 웃는 그의 미소도 환했다. 약간의 보답으로 나도 그렇게 웃어드리고 싶었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다. 도록을 살까 잠시 고민했다. 방금 본 글과 그림이 예쁘게 담겨 있었다. 그런데 왠지 이 전시는 마음으로만 담아두고 싶었다. 약간 손에는 덜 쥐고 싶었다. 그림의 일부로 만들어진 엽서만, 자리에 없던 다른 작가의 책만 샀다. 내 안의 무언가에도 빛이 쏘이는 듯했다. 뭔가 꼬인 일을 스스로 합리화할 때 종종 하는 생각을 또 했다. 이 좋은 빛을 느끼기 위해 오늘 아침 남의 차가 밀리지 않은 거라고.
한층 더 무거워진 가방과 우산을 들고 카페로 향했다. 내 주먹 세 개를 이어 놓은 것 만큼 큼직한 앙버터 크로와상을 와구와구 먹어치웠다. 맛있었다. 작업하거나 공부하기 좋은 곳이라는 홍보 문구를 내건 그 카페와 어울리지 않게 나만 거하게 식사를 하러 간 사람 같았다. 허기를 채우니 머리에도 생각이 차기 시작했다. 최근 재정비한 일들을 포스트잇에 적으며 노트북의 부재를 아주 잠깐 아쉬워했다. 그러나 그것까지 들고 왔으면 난 아마 타이핑할 손 자체가 진작에 없어졌을 것이다.
저녁 수업이 취소되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했기 때문에 놀랍지는 않았다. 혹시나 해서 들고 온 교재들의 질량이 다른 날보다 더 묵직하게 느껴질 뿐. 대신 더 가벼운 맘으로 생각을 다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탔다. 그러고 나서 어제 다녀왔던 병원에 다시 들렀다. 약을 두 개 사놓고 하나를 두고 왔기 때문이다. 정신을 안 차리면 이렇게 일을 두 번 한다. 무사히 약을 받아 가장 가까운 우체국으로 걸었다. 환승을 할 수 있는 상태였지만 마땅한 버스가 없어 그냥 걸었다. 5분이 넘어가니 손이 너무 시렸다. 하루 종일 자꾸 벗겨지는 오른쪽 양말도 더 이상 추켜올릴 힘이 없었다. 우체국은 그나마 가방을 조금 비울 수 있는 기회의 장소였다. 고작 100g쯤이었지만. 우편물을 부치고 집 근처 상가까지 또 걸었다.
이번엔 안경점. 동네 주민 찬스로 때마다 실리콘 소재 코 받침대를 교체하는 곳이다. 꼭 오른쪽 받침대만 망가진다. 늘 왼쪽은 멀쩡해서 더 오래 쓰고 싶은데 오른쪽이 한 번 망가지면 아예 뒤집어 까져서 안경이 얼굴에 고정이 안 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갈아줄 수밖에 없다. 실리콘 소재는 사장님 덕분에 처음 써봤다. 확실히 콧대에 부담이 덜 간다. 어느 날 갑자기 망가져서 곤란해지는 건 불편하다. 한번은 매번 서비스를 받는 게 민망해서 오래 쓰게 잘 망가지는 실리콘 재질 소재 말고 플라스틱 재질 소재로 끼워달라 했다. 그러나 친절한 사장님은 예상보다 단호하셨다. 더 자주 오는 분도 있으니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 오시라고. 그래서 여전히 부담은 되지만 언제든 가고 있다.
드디어 집. 우산은 결국 오늘 한 번도 펼치지 않았다. 대신 전시회에서 사 온 책을 펼쳤다. 어깨는 아침보다 더 뻐근해졌고 며칠 전 친구 결혼식에서 몇 시간 동안 들고 다닌 카메라보다 무거웠던 가방 때문에 팔 전체가 저렸다. 잠깐 등을 침대에 붙여주기로 했다. 영상을 편집하느라 몇 시간을 내리 앉아 있어야 할 잠시 후의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었다. 책은 얇고 가벼워서 자리 잡고 읽으면 두어 시간이면 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할 일이 있으니 다음에 다 읽자 다짐하고 머리말부터 살폈다. 페이지가 금방 금방 넘어갔다. 어느 틈에 벌써 여섯 번째 챕터에 진입했다. 정신을 차린 건 작가가 방문한 어느 동네 이름 덕분이었다.
삼호. 사실 이 단어 때문에 오늘 오랜만에 글을 쓸 수 있었다. 책에서 읽은 삼호는 오늘의 세 번째 삼호였다. 첫 번째 삼호는 새로 시작하는 수업의 주소지에서 봤다. 오늘 첫 번째 일정이 생긴 이유다. 두 번째 삼호는 그 첫 번째 목적지 바로 옆에 있던 아파트 이름이었다. 그때만 해도 별 우연이 다 있네, 하고 넘어갈 만했다. 저녁에 읽은 책에서까지 삼호를 만나니 더는 망설일 수가 없었다. 나에게만 의미 있는 이 사건에 관해 더는, 안 쓰고는 견디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앞으로도 잘 못 견딜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오늘 쓴 글이 브런치를 시작한 처음의 다짐과 가장 흡사한 느낌이라서 조금 신났다. 그럼, 가까운 시일 내에 다른 종류의 삼호를 또 만나기 바라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