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유리 Mar 01. 2020

'아직도' 괜찮냐는 질문에


종종 인스타그램 DM이나 댓글로 '아직도 괜찮냐' 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이혼하자마자 괜찮다는 식으로 글을 쓰시던데, 정말이냐고. 이제 8개월이 넘게 지났는데 아직도 괜찮냐고. 혹은 어떻게 극복했냐고. 



질문의 이유가 '나도 계속 괜찮을지 걱정되어서' 또는 '나는 언제 괜찮아질지 궁금해서'인 것 같아 타인에게 그 척도를 두심이 조심스러워 답변을 모두 드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소식 궁금해하시길래 기억에 남는 답변과 함께 오랜만에 글 남깁니다. 


* 다만, 이 글은 제 개인의 일상을 담은 

일기 같은 글 임을 미리 밝힙니다.





공간이 주는 행복.


매일 부대끼며 시간을 보내서 침대 1개만 한 집에 살아도 부족함 없이 살겠다고 늘 얘기했었던 두 사람이, 8년이라는 세월 앞에 하나의 공간을 공기까지 반으로 뚝 잘라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무렵- 그 느낌은 돌이켜보니 참 숨 막혔었다. 


나는 혼자가 서툴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혼자가 된 후 그 공간이 오롯하게 내 것이 됨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요함과 평화, 익숙함을 사랑하는 내게 나만의 공간이 된 것은 생각보다 큰 행복을 주는 요소였다.


그리고 몇 주 전, 이사를 왔다. 여러 가지 사유로 이사를 해야 했지만 버려도 버려도 등장하는 흔적과 여러 불편한 시선도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도 충분한 예산으로 온전하게 나의 취향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하는 것 또한 진짜 큰 행복임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대단히 방해를 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누구도 나의 선택을 방해하거나 공간을 흩트릴 수 없다는 것이 공간에 대한 애착을 높였다. 



냉장고에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다는 것도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다. 시댁에서 김치통 사이즈에 가득 담아 주시는 반찬들은 안타깝게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도 내 입맛도 아니었다. 


만드는 사람의 고생을 알겠는데다 챙겨 주심에 감사한데도 챙겨 먹지 못해 모두 버려야 하는 나도 죄책감에 고통스러웠고, 버리는 내내 코를 막고 씨름하는 상황도, 버리는 걸 도우며 너무하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모두에게 고통 같은 일이었다.


지금 내 냉장고에 반찬이라고는 김치밖에 없지만 한우나 막창구이처럼 나를 위한 소중한 한 끼를 즐길 수 있는, 버리지 않을 음식만 고심하여 담았고 김치냉장고는 온도를 조절하여 한 칸은 주스, 한 칸은 우유, 한 칸은 커피, 한 칸은 탄산수를 줄 맞추어 채웠다. 


보기만 해도 배부른 냉장고가 주는 위안을 논하자면 몇몇 친구들은 너무 소소한 행복인 거 아니냐고 했지만, 단 하나의 음식도 방해하지 않는 마음에 쏙 드는 냉장고를 되찾는 일은 겪어보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2020년, 2월 27일 목요일.


금요일 휴무를 선언하고 올해부터는 목요일마다 도우미 아주머니를 모셨다. 그렇다. 오늘은 목요일이다! 덕분에 나는 아주 청결한 내 공간에서 금요일부터 시작하는 3일간의 주말을 맞는다. 1주일에 한 번이면 충분한 빨래는 덕분에 세탁기 근처에도 갈 일이 없어졌고, 분리수거, 쓰레기 버리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 날은 많지 않지만) 집이 깨끗해서 별로 할 게 없는 날이면 창틀 청소나 냉장고 청소를 해주신다. 화장실은 거울이며 모든 유리들에 물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며 집에 도착하자마자 강아지들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이 귀찮은 내게 목요일은 칼퇴가 하고 싶고 퇴근길에 콧노래가 나오는 그런 날이다.





행복에 따른 소비.


집안일을 대행해 준다는 것이 아직도 생소한 사람이 많지만, 요즘은 아주 많은 청소 관련 플랫폼이 존재한다. 평균적으로 약 3시간의 정리를 해주시는 데에 필요한 비용은 약 3-4만 원. 그렇게 나는 한 달에 약 13만 원의 비용을 지출하고 주 1회 집안일을 맡겼다. 


내가 내 돈 벌어 부르겠다고 하는 데에도 여자가 집안일을 직접 안 한다고 싫어하는 사람 덕분에 이 행복을 잃고 살았다니. 나는 당최 13만 원이라는 금액의 돈을 어디에 쓸 데에도 느끼지 못했던 인생 최고의 행복을 얻었다. 


내가 가진 모든 가방의 가격을 합쳐보니 약 60만 원 정도가 되더라. 백화점에 돈을 쓸 때 얻는 행복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만족도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나는 내 기준 가심비 최고의 선택을 찾았다.





이쯤 되면 지겨우시겠지만

Do love your self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익이라고 표현하던 사람과 8년을 보냈다.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가장 잘 팔리고 25일 당일엔 찾는 사람이 많지만 그게 마지막이며 26일부터 값어치가 말도 안 되게 떨어지는 그 케익이 여자 나이와 똑같다고 표현했었다. 


22살에 연애를 시작한 나보다 7살이 많은 네 나이는 어쩌냐고 반문하면 남자는 서른부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지나고 보면 어찌나 심각한 헛소리인지 그냥 헛웃음이 나오는데 왜 그 시절 나는 그런 이야기로부터 자존감을 떨구었는지 그랬던 스스로에게 화만 난다.  


지금은 해가 뜨면 무지개 사진을, 해가 지면 노을 사진을 보내주는 사람과 연애를 한다. 기분이 안 좋으면 춤을 춰주고 잠이 안 오면 노래를 불러준다. 나는 그렇게 그 순간순간에 충실하며 하루를 살게 되었고, 내 기분이 곧 당신의 기분이 되어주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며 더 쉽게 자존감을 되찾았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순간, 

세상이 나를 사랑했다.





그래서 아직도 괜찮냐고 물어볼 만큼

위안이 필요했던 당신께.


저 또한 이만치 괜찮을 줄 알고 선택한 게 아니었어요. 사실 너무 빨리 괜찮아서 스스로도 많이 놀랐고요.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잖아요. 그 환경에 적응해져 있었어서 부당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스물스물 익숙해져 살았어요. 


(여전히 제가 괜찮았으니 다들 괜찮을 거라고 들릴까 조심스럽지만) 역시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니 혹 결정에 대해 불안하고 위안이 필요한 당신은 행복해질 확률이 높을 거예요. 아직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결혼은 부당한 게 너무도 많으니까요. 


상대가 잘했고 잘못했고 집안이 여쨌고 저쨌고 제 개인사와 연관 있는 부분들을 다 떠나서, 그냥 혼자 조용히 지내던 명절에 맞는 햇살이 얼마나 따사로운지, 생일이나 제사만 챙겨도 매 달 찾아오는 그 행사들이 사라지면 얼마나 많은 개인의 시간이 생기는지, 내 공간과 내 시간이 스스로의 정신 건강에 얼마나 필요한지만 보더라도요.





다만, 

행복한 일이 생겨도 

행복한 줄 모르면 불행합니다.


결혼과 이혼과 관계 없는 누구에게라도 

행복한 일은 사방에 널렸습니다. 


혼자이든 둘이든, 날이 좋든 흐리든, 

바빠도 한가로워도, 더워도 추워도, 

그렇게 매일매일 야금야금 계속-계속 행복하세요!


뒤숭숭한 요즘, 모두의 안녕과 건강을 빕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