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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 Mar 12. 2023

우리나라는 왜 한일전에서 졌을까 (2)정신론 공격


껌과 세레머니 그리고 정신론


호주전 7회말 강백호가 2루타를 치고 세레머니를 하다 베이스를 안 밟고 태그당하는, 통한의 사건이 터졌다.



실시간으로 보면서 목이 콱 막히더라.

화가 나서? 프로 의식 없어 보여서? 쟤는 역시 까야겠다 싶어서? 

........아니, 모두가 그렇게 말할 거란 걸 예상했으니까.


지난 도쿄 올림픽 때 강백호가 덕아웃에서 껌을 씹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고, 은퇴하고 이젠 야구 잘 안 보시지만 아직도 대단하신 박찬호 해설위원께서 대놓고 "저러면 안됩니다"라고 대차게 깐 이후로 그는 삼천만 악플러에게 시달렸다.

프로 의식 없다, 가정 교육 못 받았다, 관상 봐라, 저러니 못하는 거다, 대한민국 야구대표팀 정신머리 빠졌다 등 온갖 욕이 쏟아졌다. 


껌을 씹는 것 자체는 다른 선수들도 다 하는 일이고, 심지어 강백호는 당시 꽤 성적이 좋았으며(져서 묻혔지만), 무심한 표정으로 있었던 건 투수 교체 타이밍이라고 KBO 총재가 직접 나서서 해명까지 해줬지만 강백호는 전국민에게 그냥 '껌씹는 걔'가 되었다. 야구를 그만둘까 싶었을 정도로 괴로웠다고 한다.


그런 국제전에서의 오랜 트라우마와 답답한 경기 상황을 뒤바꾸는 통렬한 한 방이었으니 본인은 얼마나 기뻤을까. 얼마나 기뻤으면 야구 선수가 기본 중의 기본 중의 기본인 베이스 밟는 것마저 깜박했을까.


절대 변명을 할 수도, 실드를 쳐줘서도 안될 실수다. 

하지만 그걸 본 순간, 야구팬의 머릿속에 벼락같이 스쳐가는 건 분노나 실망보다도 '또 얼마나 물어뜯길까'하는 거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렇게 힘들어했는데, 더 힘들어지면 어떡하나. 

이번엔 아무도 미약한 우산조차 펴줄 수 없는데.


뭐, 강백호는 그 다음날 한일전에서 다시 한번 2루타를 때려내 그 누구의 비호도 필요없이 스스로 실력을 증명하긴 했다. 

그렇다. 야구팬이라면 강백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하는 타자 중 하나라는 것쯤은, 야구를 열심히 하는 선수라는 것쯤은, 평소에 믿음이 안가는 빈 깡통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 이겨내도 본전일 뿐이다.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고, 비판하는 건 관객의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하는 그 모든 이들에겐.




방구석에 앉아서 타인들의 삶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세상에서, 대중에게 노출되는 삶은 엔터테인먼트가 되었다. 

오락을 위해 만들어진 콘텐츠에 평점을 매기고 리뷰를 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

그렇게 사람들은 관객의 시선에서 타인의 삶을 두고 리뷰평을 남긴다. 때로는 다른 관객들과 감상을 나누고 눈에 띄기 위해서 더 재치있게, 더 날카롭게, 더 웃기고, 더 아픈 말들을 지어낸다.


"네가 선택한 일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라든가 "누가 칼 들고 협박했니?"같은 최근의 유행어는 이런 잔혹한 관객 문화를 반영한다.

타인을 공감할 수 있고 이입할 수 있는 상대로 보지 않는다. 

나는 비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시청자고, 타인의 실수와 위기와 좌절은 그 '대상'이다. 이 정도의 거리감이니 누가 파멸해간다고 한들 TV 드라마와 비슷할 뿐이다.


이런 관객의 시선은 압박을 정당화하며, 그것이 설령 불합리한 것이라도 견뎌내지 못한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기 쉽다. 

쉴새없이 면접자를 공격적으로 압박하면서 인신 공격에 가까운 말을 쏘아내는 압박 면접, 근성을 불어넣기 위한 극한 훈련, 국제전을 앞두고 준비된 악플러들.

이들의 공통점은, "압박에 진다면 다 너네 정신력이 약해서"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WBC 시작 전부터 한국 대표팀이 국제대회, 특히 한일전을 앞두고 느끼는 정신적 부담감이 상당하다는 기사가 나왔다. 도무지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 회식도 못했다고 한다.

왠지 모르게 '야구는 이기는 게 당연'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는데 지난 국제대회에서의 성적이 좋지 않았던 데다 한일전이라는 특수성이 더해지기까지 했다.


저 수많은 관객들을 보라.

평소엔 야구를 보지도 않아서 야구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 아니면 좀 깨작거리다 안본지 10년이 넘는다.

(베이징 올림픽이 2008년이었단 사실을 아시는지?)

어찌되었든 그들은 야구 선수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몸, 점수, 연봉, 프로의식, 가정교육, 인성, 그들에게 들어가는 세금의 적합성(사실 야구는 세금보단 구단들의 돈으로 운영되지만), 병역 면제의 합리성(이번 WBC는 딱히 특혜와는 관련이 없지만), 애국심, 정신력과 인생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선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말을 얹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오천만의 압박이 정말로 한국 야구의 향상에 도움이 되는 걸까?

이 압박에 짓눌리지 않는 것이 야구 선수들의 직무에 해당되는 건가?

...어떻게 하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야구를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고 믿는 선수들이 형편없이 깨졌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경기에서 졌다는 사실이 슬프고 화나고 발전을 촉구하기에 앞서 인터넷 뉴스 기사 헤드라인이 얼마나 엿같을지 하는 생각에 겁부터 나는 게 야구팬들이 겪어야 마땅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시합에서 졌다는 게 슬프고, 상대팀이 비해 수준 차이가 났다는 게 분하다. 

그건 야구에 대한 마음이다.


선수나 야구를 공격하는 여론이 무섭고, 팀이 망가질까 걱정되고, 벌써부터 주눅이 든다.

이건 야구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냥 트라우마지.

적어도 야구에 대한 것만으로 가슴이 아프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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