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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 Mar 13. 2023

우리나라는 왜 한일전에서 졌을까 (3)


이번 한일전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우리 투수가 노리고 던진 변화구를 일본 타자들이 그냥 지켜보았을 때였다. 일본 선수들은 떨어지는 공에 전혀 속지 않았고, 배트를 휘두르지도 않고 그냥 봤다. 그리고 한국의 빠른공은 힘들이지도 않고 쳤다. 너무 쉽게.

한편 타자들도 잠깐 반짝한 몇명을 제외하곤, 전반적으로 심하게 분위기를 타지 못했다. 


....그런데 이 선수들이 못하는 선수들인가?

아니, 전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선수들을 전부 모은 거다. (정확히 말하자면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은 안 뽑았지만, 뭐 안 뽑을만한 이유는 있었으니까.)

국제대회 베테랑들과 인정받은 유망주들, 여기에 출중한 현역 메이저리거도 2명이나 있었다. 전력상으로는 전혀 나쁘지 않았다. MLB 공식에서는 도미니카 공화국, 미국, 일본의 뒤를 이어 베네수엘라와 함께 우승 확률 4위의 팀으로도 뽑혔다. 

물론 저 위의 셋이 너무나 사기적이라 3위 이하로는 거의 의미가 없고, 이변이 속출하면서 믈브의 보는 눈이 의심스러워지긴 했지만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 정말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선수들의 플레이는, 분명 우리가 평소에 봐왔던 그런 플레이가 아니었다.

리그에서 던지던 대로 던져서 홈런이나 맞았으면 억울하지나 않았겠지.

그러나 모든 플레이가 훨씬 느리고, 딱딱하고, 둔하고, 지쳐 있었다.


왜 그럴까?

열심히 하지 않아서?

정 신 을 똑 바 로 차 리 지 않 아 서?


아, 그놈의 정신, 정신. 

그래서 그런 정신이 뭔데요?

정신을 어떻게 차려야 하는데요?

그렇게 물어보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정신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정신론자들은 "열심히 하라고"란 말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해봤자 "나 때는 안 그랬다"란 이야기인데, 그 때가 20여년 전이며 또 뭘 어떻게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확실히 이번 2023년 WBC에서 한국 야구 대표팀이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성적 뿐만이 아니라 경기력의 문제가 심각했다.

하지만 야구팬으로서 왜 투수들의 컨디션이 떨어졌는지, 왜 타자들이 공에 손도 못댔는지, 왜 수비에서 집중력을 잃었는지 알고 싶다.

그것이 인프라의 문제, 기량 자체의 문제, 훈련의 문제, 데이터와 전략의 문제였다면 받아들이고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정신 차려라" "열심히 안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원인에 대해서는 모른다. 혹은, 중요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게다가 요즘같은 트렌드엔 참사, 지옥, 분노, 정신머리, 이런 단어들이 '쓰디쓴 잔소리'로 포장되어 쏟아진다. 자기 기사 조회수와 유튜브 클릭수를 올려야 해서 점점 더 자극적인 말들을 처덕처덕 붙인다. 심지어는 한때 야구인들이 하는 이야기조차 놀랍도록 대책이 없다.


이순철 해설위원은 한일전 이후의 체코전에서 나온 정철원의 폭투에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저렇게 던지면 안된다."라고 짖었다. 평상시에도 젊은 선수들에게 막말하기로 유명한 인물인만큼 새삼스럽지는 않으나, 내내 한국 경기를 중계하면서 정철원이 3번째로 나왔고 연습 경기까지 합치면 일주일에 5번 등판했다는 사실을 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놀랍다.


시즌 직전에 국제대회를 준비해야 하는 일정상의 부담까지 짚지 않더라도, 당장 우리 대표팀은 대회 시작 전 현지 사정으로 다양한 어려움을 겪은 바 있다. 두산 베어스같은 경우에는 스프링캠프를 호주에 차려서 호주-한국-미국-한국-일본 총 40시간을 비행기에서 보내는 바람에 공항에서 서서 조는 사진까지 찍혔고, 대표팀의 절반 가까이 현지 사정으로 비행기가 연착되어 버스를 타고 수 시간을 이동하는 듯 법석이었다.

유달리 예민한 투수들이 이에 영향을 받지 않았으리라고는 말할 수 없다.


또 한일전이라는 특성, 지난 경기에서의 부진한 성적으로 인한 압박과 긴장감 역시 크게 한 몫했을 것이란 추정은 쉽게 가능하다.

적당한 긴장감은 집중력을 높여주지만 이번에는 "선수단이 모여서 회식은 한 적 없다.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르니)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한 선수가 토로했듯, 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 같지도 않다. 


물론 이런 사실이 좋지 않은 경기 내용에 대한 변명은 될 수 없다.

단지 이유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리그 최고의 선수가 단 한 이닝도 멋지게 플레이하지 못했다면, 평소에는 150km/h가 가뿐하게 나오는 선수가 힘껏 던져도 140km/h 초반대밖에 던지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뭘까? 

정신머리가 빠져서?

정확히 무엇인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는 그 '정신'만 있었더라면 구속이 올라갔을까? 제구력이 나아졌을까? 정신이 상대 타자를 압도해서 못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래도 상관없다"고? "정신력이 있으면 다 해낼 수 있다"고?

국가대표니까 팔이 부러져라 던지라고?


...여기에서 우리는 정신론의 민낯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정신론이야말로 정신에는 가장 관심이 없는 관점이다.

정신론은 결과만능주의로 완성된다.




나이든 어른들은 "정신력으로 무장하면 이기지 못할 것은 없다"라고 꽤 쉽게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불과 수십년 전, 그 어른들은 거지꼴이던 나라를 일으켜 세웠고 그땐 서른살이면 집 하나 차 하나 애는 둘씩 있었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1984년, 부산의 야구팀은 한 투수의 어깨를 제물로 바쳐서 우승했다.

"동원아, 우짜노 이까지 왔는데"라는 감독의 말에 "네, 알았심더. 함 해 보입시더."라고 말했다던 최동원은 한국시리즈 7경기 중에 5경기를 나와 4승 1패 40이닝 610구를 던졌다.


롯데 자이언츠 팬들이 죽을 때까지 자랑할 낭만이자, 이 팀이 해체할 때까지 헤어나오지 못할 업보다.


지금 보면 감동보다도 먼저 소름이 돋는 기록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등판이 몸에 얼마나 큰 무리가 가는지에 대한 분석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고,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팽배한 시기였다.


실제로 최동원 선수가 그렇게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정신력 외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가 여전히 모든 야구팬들의 존경과 경의를 받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2020년대에는 그런 선수가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도 안된다.

적어도 팀 차원에서는, 시대적으로는 결코 지지할 수 없다. 

그리고 누가 독하게 마음먹는다고 해도 그렇게 되기도 힘들다.


인정하자. 지금은 노력해도 면접에서 떨어지고, 노력해도 학교폭력을 당하고, 노력해도 집을 못 사고, 노력해도 우울증에 걸리는 시대다.

어른들은 "그게 다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말한다. '우린 했는데, 너넨 왜 못하냐'다. 옛날엔 굶어가면서 공부해서 성공했는데, 등따시고 배부르게 자란 너흰 왜 그렇게 못하나. 최동원 선수는 그렇게 했는데, 더 잘먹고 곱게 자란 요즘 선수들은 왜 더 약한가.


그래, 이 시대는 형편없고 우리는 나약하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이 어떤지 그들은 모른다.


예전엔 대학 졸업만 해도 좋은 회사에 취직이 어렵지 않았지만 지금은 3개 국어가 가능한 인재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예전엔 가게를 하나 열면 기껏해야 동네 가게들이나 신경쓰면 되었지만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중국의 공장이나 전세계 브랜드들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다.


예전에는 헝그리 정신 하나만으로 빠따를 수천번씩 돌리면서 연습하는 게 다였지만, 인간의 내외부를 스캔해서 정확한 데이터로 분석하는 요즘엔 온갖 근육을 단련하는 훈련법만 수천개다. 어떤 훈련법이 적당한지 고르는 것부터 중요하다. 


솔직히 말하면, 꼰대들이 잘난척 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게 그들이 더 쉬운 시대에 태어나 운이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도 그들의 시대를 살지 않았는데.


그러니 타인의 노력에 대해선, 아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법이다.




야구팀이 고작 10개 뿐이고, 선수들이 다들 투잡을 뛰면서 처음으로 국제전에 출전한 체코는 야구 초강국인 일본을 상대로 1회를 리드했다.

선발 투수 사토리아는 천하의 오타니 쇼헤이를 2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심지어 두번째 타석에서 오타니는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자세가 무너지면서 크게 헛스윙을 했는데, 체코 덕아웃이 환호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사토리아씨가 어찌나 함박웃음을 짓던지 보는 사람이 다 뿌듯할 정도였다.)


체코는 굉장한 기백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매력적인 야구를 했다.


하지만 9이닝은 길다.

처음에 일본 타자들은 사토리아에게 꼼짝 못했지만, 사토리아 공은 구속이 느렸기 때문에 곧 익숙해졌고, 그 순간부터 안타를 쳐냈다. 그 다음부터는 그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야구는 흔히 분위기 싸움이라고들 하고, 단기전은 더욱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당장 이번 WBC 1라운드에서도 네덜란드가 쿠바를, 체코가 중국을, 멕시코가 우승후보인 미국을 이기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러니 체코가 일본을 이기지 못한 것은 그들의 정신이 다른 나라들보다 살짝 부족했기 때문인걸까?

우리도 정신력만 있었더라면 승리했을까?


야구라는 스포츠는 뜨겁고도 차갑다. 

9회말 2아웃 9:0의 상황이라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뒤집을 수 있는 감동이 있는 스포츠이자, 사람을 등급별로 나누고 순서대로 등장시키는 잔인한 스포츠이기도 하다.

연봉 차이와 직무(선발-불펜과 같은) 차이, 리그의 수준 차이는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이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나라의 상위 리그다.

리그의 운영 시스템도, 선수들의 수도, 평균적인 기량도, 연봉 수준도, 데이터 및 전략 기술도 모두 위라는 이야기다. 일본의 야구 인프라는 우리나라와 비교가 안된다.

일본엔 고교 야구팀만 1400개가 있다. 엘리트 체육고만 200개다. 

우리나라는 야구부가 있는 고등학교가 100개가 채 되지 않는다. 


한일전을 마치고, 우리나라에서 현재 최고의 가능성을 지닌 타자인 이정후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공이었다."고 말했다.

수준 차이를 확인하게 되는 것은 뼈아프다. 하지만 적어도, 무엇을 해야할지 혹은 앞으로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할 수는 있다.


어떤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혹은 승리하기 위한 노력은 얼만큼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그것을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이야기한다고 한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 이야기하자.

상처투성이인 한일전이 남긴 교훈은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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