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지 않는 마음으로
"뒤돌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쭉 그어야 해."
궁서체를 연습하는 시간. 물로 쓰는 서예용품으로는 곧잘 하더니 화선지에 '진짜 먹'으로 써내려가려니 힘든가보다. 아이들의 손이 바들대거나, 혹은 오히려 조급해진다. N는 쩔쩔매다 기어이 툴툴대고마는 짝 K 에게 말했다.
"쭉 그어서 일단 다 하고, 사물함까지 가서 봐봐. 멀리서 보면 또 나름 괜찮아."
뒤돌지 않는 마음이란 어떤걸까? 오랜 시간동안 될 수 도 있었을 최선의 나와 끊임없이 경쟁을 붙였고 출전하는 그 마음은 시끄러웠다. 애초에 교대를 안 갔다면? 그 저녁에 테이블 사달라고 안 졸랐다면 지금도 그 사람과 사귀고 있을까? 친구를 그날 비겁하게 모른척하지 않았더라면? 이모가 그렇게 사라고 했었던 중계동 아파트를 그때 샀었다면? 뒤돌아보는 건 습관과도 같아서 참패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간편한 말 뒤에 숨었더니 솔직히 편안했고 다치지 않을 만큼만 싸우고 돌아오는 것 또한 가끔씩은 달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나의 선도 쭉 그어보지 않은채로 그렇게 머뭇댄 날들이 길었다. 아쉬움은 많고 용기는 없는 사람의 발걸음은 처음 하는 붓글씨와 비슷하다. 수직으로 세운 결연한 붓 아래로 먹물만 똑똑 흘리는 것처럼 어디 하나 나아가지 못한채 화선지만 버리게 된다.
사르트르가 그랬다더라.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그렇게 되기로 선택했던 그라고. 슥슥슥 먹을 힘주어 갈고 서진의 위치를 바로 잡은 나, 당찬 선을 쭉 그어보는 나를 떠올려본다. 두 아이에게 다가갔다가는 그대로 두어발 떨어져서 숨을 잠깐 훅 참는다. K가 마침내 검정색 먹물 선으로 흰 바탕을 쭉 쪼개는 순간이 멋졌기 때문이다.
벼루 가장자리에 붓을 다듬으며 K가 N에게 묻는다.
" 근데 멀리서도 이상하면 그땐 어떡하냐?"
N이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더니 눈썹을 팔자로 만들며 웃는다.
"멀리서 봐도 좀 그러면 그건 고쳐야지. 시간은 많~~아요, 그 전에 후딱 했으면은."
참으로 안전한 결과인걸? 멀리서 두고 보았을때 괜찮은 삶이거나 그때 가서 아니라면 다시 고칠 시간이 많이 남는 삶이라니. 이거야 말로 '노 리스크 하이 리턴'이 아닌가. 멜로디를 넣어서 하는 '시간은 많~~아요.'라는 노래 같은 말. 그 아이들 담임이, 그러니까 내가 자주 하는 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