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사람들
10년 전, 미국의 PBS에 출연한 에릭 와이너는 자신의 책, ‘누구에게나 신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Man seeks God)’의 저술 배경에 대해 담담히 고백했다. 10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한국의 한 출판사가 준비한 유튜브에 꽤 나이 든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저자는 10년 전과 다름없는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기억은 만성병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절, 즉 죽음과 병에 대한 두려움이 자신을 지배하던 시간으로 돌아간다. 당시, 그를 담당하던 간호사가 무심코 그에게 던진 “아직 당신의 신을 만나지 못하셨나요?”라는 질문은 그로 하여금 여러 가지 종교를 탐험(seek)하게 했다. 그리고 그 탐험의 기록을 이 책으로 남겼다.
저자 에릭 와이너는 유대인이다. 그가 밝힌 바에 따르면 대개의 유대인이 그렇듯 그 역시도 어린 시절 코셔와 정결 의례로부터 신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례를 통해 신을 인지했다. 신은 대개 의례라는 옷을 입으면서 종교가 된다. 저자는 어린 시절 자신의 신과 종교에 대한 인식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세속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우리가 하느님을 입에 올리는 것은 누군가가 발가락을 다치거나, 특히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뿐이었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만 유대인이었다. (...)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면, 그건 유대 음식이고, 따라서 하느님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하느님은 천국이나 우주의 거대한 공동이 아니라 냉장고 안의 크림치즈와 샐러드 드레싱 사이에 존재했다.”
가끔은 책의 내용보다는 저술 배경에 대한 궁금증으로 선택되는 책이 있다. 이 책 역시도 그런 부류의 책이다. 태생적 종교의 지평을 확대하여 종교가 담고 있는 신을 찾겠다는 의지, 마치 니체의 말처럼 카오스 속에서 춤추는 별을 찾는 방랑의 기록, 그런 것들이 저자가 경험한 종교별 성격이나 내용보다 더 궁금한 것들이었다.
솔직히 말해, 이 책에서 보여준 에릭 와이너의 ‘신 찾기 프로젝트’는 다소 허탈한 결론으로 끝난다. 책의 결론 부분에서 저자는 자신의 종교 여행을 이끌었던 “아직 당신의 신을 만나지 못하셨나요?”라는 간호사의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라고 말한다. 신은 결코 목적지가 아니라 일종의 탐색이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면서 ‘신 찾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가장 불쾌한 부분들을 단순히 수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랑해도 될 만한 것으로 바꿔놓는 것. (...) 이것은 항상 선물일 뿐, 우리에게 마땅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부러 찾기를 멈춘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찾기를 멈춘다.’라는 표현에 주목하게 된다. 이 말은 ‘의지의 소멸’ 또는 ‘자기 비움’과 동의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굳이 기독교적 언어로 번역하자면 아마도 ‘케노시스(kenosis)’ 정도가 되지 않을까?. 사실 ‘자기 멈춤’, ‘자기 비움’은 모든 유신론적 종교가 가지고 있는 가치이다. 유신론적 종교인들은 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이자 의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성경에도 에릭 와이너의 결론과 유사한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엘리야의 고백이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앞으로 나아가 주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니라. 보라, 주께서 지나가시는데 주 앞에서 크고 강한 바람이 산들을 가르고 바위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수었으나 주께서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아니하였으며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있었으나 주께서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아니하였고, 또 지진이 있은 뒤에 불이 있었으나 주께서 불 가운데에도 계시지 아니하였으며 불이 있은 뒤에 고요한 작은 음성이 있더라.”
강한 바람과 지진, 그리고 강력한 불길, 방황하는 모든 인생을 대변하는 선지자의 카오스와 그것이 멈춘 뒤, 비로소 들리는 고요한 신의 음성이 대비된 아름다운 문구이다. 어쩌면 에릭 와이너는 스스로 여러 가지 종교를 통해 신을 찾아 나섰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다양한 종교 속에서 공통된 음성, 즉 신의 속성을 발견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에릭 와이너의 ‘신 찾기 프로젝트’가 독자들의 종교관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신을 찾는 여정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 역시도 과정에 의미를 두고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잠 못 이루는 밤, 침대에서 뒤척이다, 일어나 잠시 시간을 내어 읽는 것과 같은 과정 말이다. 누가 알겠는가? 그렇게 잠 못 이루던 밤에 ‘예기치 못한 기쁨’이 찾아올지.
있는 것과 있음
“누구에게나 신이 필요한 것일까?”라는 질문 이전에 우리는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있는 것과 있음”에 대해 물어왔으며 이는 신의 존재(있음)를 다투는 논쟁으로 전이 되기도 했다. 우주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제1 원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에 대해 묻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물음이다. 따라서 “있는 것은 왜 있는 것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은 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물론 철학자들과는 달리 대체의 신학자들은 가장 명확하게 신의 존재에 대해 답을 낸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신은 그 자체로 변하지 않는 실체 (우시아, ousia) 이며, 제1 원인(아르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종교 여행은 아르케를 찾기 위한 것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종교의 옷을 입은 인간들이 각자의 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고찰인 듯하다. 그러나 사실, 신의 존재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개신교나 천주교, 이슬람교나 유대교는 같은 실체를 믿지만, 그 믿는 방법(실재)에 따라 각각의 종교로 분류된다. 결국 실체(신)는 실재(인간)에 의해 결정된다.
모든 종교는 인간과 신 사이의 거리에 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 신비주의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교리와 신조는 이 ‘거리’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거리’는 곧 ‘관계’의 문제이다. 저자를 종교 여행으로 이끌었던 동기, 즉 “인간에게 왜 신이 필요한가?”라는 질문 역시도 “인간은 왜 신과 관계를 맺으려 하는가?”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신을 만난다는 것
신을 만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비주의적 정의는 인간이 신과의 거리를 좁혀 나가다가 결국은 일체가 되는 정신적 체계를 말한다. 어떤 종교든 그 종교의 중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신비주의적 체험이 필요하다. 19세기 초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라는 책을 통해 파헤치고자 했던, 바로 그 체험.
이 책의 한글판의 뒷면에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객관적인 질문과 개인적인 영적 각성의 과정을 그린 이야기”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저자가 종교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에서 믿음의 본질에 접근하는 신비주의적 체험 없이 영적 각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저자는 신비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신비주의란 확실한 종교라기보다는 신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더 가깝다. 신비주의자들은 종교의 외적이고 난해한 측면보다는 내면의 난해한 측면들에 훨씬 더 관심이 있다. 이블린 언더힐의 고전적 정의를 빌리자면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이 바로 그것이다. 전통적인 종교의 신자들은 신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만, 신비주의자들은 신을 알고 싶어 한다”
이 말은 신학(학문)과 신앙(믿음)을 구별하는 정의로는 정확할지 모르나 신비주의와 종교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신비주의와 신과 종교에 대한 저자의 이 설명은 역설적이게도 신에 대한 궁금증으로 여러 가지 종교를 겉돈 여행의 한계를 드러나고 있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 양식을 바꾸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는데, 첫째는 뇌의 일부 조직을 변형시키는 외과 수술적 방법이고, 둘째는 아주 오랜 기간 반복하고 습관화하는 훈련이며, 마지막으로 종교적 경험, 즉 신비주의적 체험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종교적 체험은, 즉 신을 만나는 일은 외과 수술과 맞먹는 정도의 충격적 사건이다.
‘거리’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신을 찾아 나선 저자의 여행은 종교의 중심을 향하고 있었지만 결국, 아주 먼 거리를 돌고, 매우 높은 봉우리에 올라 종교를 관조했을 뿐이다. 영원히 타자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과연 신비주의적 체험 없이 어떤 종교를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필요할 때 만난 신에 대해서 우리는 정말로 알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