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봄은 참 부지런하기도 하지
퍽 눅은 기온에서 변화를 예감한다. 3월이 다 가도록 겨울 티를 벗지 못한 이 경상북도 최북단에도 마침내 생기 띤 색깔이 군데군데 포착된다. 남의 집 마당에 널린 다홍색 꽃무늬 이불도, 어촌마을 푸른 기와지붕 옆에 소담히 쌓여 있는 진달래색 부표도, 옆 동네 아무개 씨 댁 감청색 대문이 빨간 빨래집게와 이루는 신선한 색 대비도 모두 다음 계절을 기약하는 예고편 같다.
그러다 훅, 봄이 닥쳤다. 슬금슬금 움트던 게 하나둘 터지더니 곧 정신없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어어? 당황하는 새 새순이 돋고 꽃도 활짝 폈다. 심지어 볕 잘 드는 길 위의 벚나무들은 소리 소문도 없이 꽃을 다 피우다 못해 떨구고 있었다. 혹여 꽃놀이를 놓칠세라 부랴부랴 자전거를 끌고 나섰다.
읍내 외가에서 고성리까지 남대천을 따라 쭉 뻗은 벚꽃길을 달린다. 도로 위로 차 한 대 다니지 않아 팔랑팔랑 내리는 벚꽃 비가 온통 내 차지다. 아니, 내 차지인 줄 알았는데 눈앞을 아슬하게 스쳐 도로 양옆에 자리한 논으로 곤두박질친다. 겨우내 메말라 있던 논에 막 대어 놓은 물 위로 꽃잎이 하얗게 흐른다. 지난 계절의 황량한 흔적 위로 새 색, 새 계절을 수놓는다. 내가 살면서 본 중 가장 아름다운 벚꽃 놀이다. 앞으로 벚꽃을 생각할 때면 난 아마 이날 이 장면부터 떠올리겠지.
아예 들판을 황금빛으로 메우며 봄을 알리는 녀석도 있었다. 행곡 가는 길, 아직 마른 흙빛인 논과 작물이 겨우 연녹색을 띤 밭 중간에 불쑥 무언가가 눈부시게 솟아있었다. 이 봄에 저리 누렇게 익을 게 뭐가 있나, 지금은 벼 나올 시기도 아닌데. 갸우뚱하다가 마치 불을 처음 발견한 원시인마냥 도 트는 소리를 냈다. 이게 보리구나! 겨울에 쌀 떨어지고 나면 다음 가을 추수 때까지 넘어야 한다는 보릿고개의 바로 그 보리구나.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는 처음 봐. 봄 햇살이 작물로 잠시 몸을 바꾸면 꼭 이런 모습 아닐까, 바람에 물결치는 모습이 말 그대로 찬란하다. 그 뒤로는 길 가다 보리밭을 마주치면 어쩐지 반가워서 혼자 아는 척하며(‘어머, 보리네 보리!’) 셔터를 마구 누르게 됐다. 제목이 ‘보리밭’이라는 이유로 옛 가곡을 일부러 찾아 들으며 흥얼거리기도 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계절이 거의 끝물에 다다를 무렵 매화리 어느 논에서도 뜬금없는 봄 빛깔을 발견했다. 제법 푸릇푸릇한 모 줄기 여기저기 선명한 분홍색 덩어리가 엉겨 있었다. 정체가 뭘까? 고민하며 골똘히 쳐다보는데 옆에 우렁이들이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게 보였다. 제초제를 쓰는 대신 우렁이 농법을 한다더니… 아? 다시 한번 도 트는 소리를 낸다. 우렁이알이구나! 생김새는 꼭 생선알 같아 징그러운데 색은 정말 웬만한 봄꽃 저리 가게 곱다.
올해 마지막 봄꽃은 이 우렁이 알인가. 지금 나는 봄의 엔드 크레딧을 보고 있는 셈인가. 언제 이렇게 다 가버렸나. 고운 빛깔에 감탄하기도 잠시, 논두렁에 푹 주저앉아 쏜살 같은 세월을 한탄한다. 울진에서 보낸 시간을 더듬으며 나머지 시간을 막연히 가늠한다. 그늘 없이 바로 떨어지는 해가 제법 따갑고 바람은 미지근하게 달구어져 분다. 꽃보다는 날로 짙어지는 녹음에 더 눈길 끌릴 철이 곧 닥칠 것을 예감하며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