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UD Mar 25. 2020

존 말코비치 되기: 나를 규명하는 것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존 말코비치 되기>


나는 왜 말코비치가 아닌가


꼭두각시를 만드는 주인공 슈와츠는 꼭두각시 인형극을 하는 예술가지만 실상은 실업자와 다름이 없다. 그런 그가 아내의 권유에 못 이겨 한 회사에 들어가게 되고, 그 회사에서 엄청난 통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 통로로 들어가는 순간 펼쳐진 새로운 세상은 그에게 무엇을 가져다주게 될까?


다른 이를 통해 자아를 인식하게 되는 아이러니. 어쩌면 우리의 몸 역시 꼭두각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상상력 신선한 서사가 돋보이는 영화.




*약간의 스포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존 말코비치의 몸에서 존 말코비치가 아닌 자신의 자아로 있을 수 있었나?

    

*나는 왜 나인가?


이 세상은 '나' 아니면 '남',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뉠 수 있다. 하지만 그 ‘나’라는 사실은 언제부터 어떻게 결정되는 걸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태초엔 누구누구의 딸, 혹은 누구누구의 아들로 시작해 타인에 의해 하나의 이름이 붙여지기까지. 그렇게 점차 나는 나를 '나'라고 믿으며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나를 나로 규명 짓는 건 무엇일까?’ 나는 왜 나고, 말코비치는 왜 말코비치일까?


이러한 의문들이 영화를 통해 생겨났다. 여태껏 우리는 나 자신을 나라고 믿어왔고, 그 믿음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 당연한 사실에 한번 의심을 품어보고자 한다. 나뿐만 아니라 타인까지 나를 '나'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왔던 결론이 나를 나로 규명 짓는 건 결국 남이라는 사실이었다. 즉, 내가 남과 경계를 지을 때, 경계 안은 내가 되고 경계 밖은 남이 된다는 것이다.

만약 영화에서처럼 지금의 내 신체가 아닌, 다른 신체에서 내 기억을 가지고 살게 되더라도 그가 나임을 충분히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러한 '경계'때문이다.

그 경계엔 내가 겪어온 '기억'이 들어있다. 그 기억이 스스로를 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다.(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주의해야 할 건, 기억이 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 껍데기만 남더라도, 내가 남의 얼굴로 살아갈지라도, 나를 나라고 규명하는 건 결국 남이다. 만약 맥신이 말코비치가 된 이들을 말코비치라 불렀다면, 그들이 여전히 그들일 수 있었을까?


당신은 자신이 몸이라고 느끼는가, 아니면 몸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가?


*의식과 존재 사이



‘자아’는 의식에 불과한 것일까? 자아라는 건 개인이라는 유기체 전체가 아닌, 일부에 한정되는 것일까?


의식과 신체의 경계는 무엇일까. 인간의 경계 짓는 본능은 나와 남을 넘어 나 자체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혹시 위의 질문에 대해 지금 자신이 자신의 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 사람이 있는가? 나는 이를 경계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의식이란 건, 뇌의 활동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겠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날것의 의식이란 게 있을까? 혹시 영혼이라는 게 우리 몸에 깃들여 있기 때문에 본질을 영혼으로 믿고 있는가?

참으로 애매하다. 어느 무엇도 확실히 말할 수 없다. 지금의 기술로는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이 영화에서 나오듯이 우리의 의식이 타인에 주입된다면 그를 누구로 인지해야 하느냐는 의문만 생길 뿐이다.

 

만약 고도로 발달한 과학시대로 인해 우리의 의식을 로봇과 같은 것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면(영화 '공각기동대'처럼), 우리는 비록 로봇의 몸이지만 그것 자체를 ‘나’라고 믿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의식에 우리 스스로가 겪은 기억이 아닌 남의 기억이 들어갔다고 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나’라고 믿을 수 있을까?(남의 기억을 내것처럼 느낀다면...) 그 기억으로 인해 나에 대한 정체성에 혼란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는가?


의식에는 오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나를 나라고 자신 있게 믿지만, 그 믿음은 타인이 있기에 가능한 거라는 말이다. 내 기억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나를 나로 인정해주는 사람들로 인해서 말이다. 나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나의 정체성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세상을 발견하다



실존에 대한 의문은 언제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 같다. 특히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내 의식을 다른 곳에 주입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니, 존재 자체에 대한 범위가 더욱 '의식'에 집중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자아에 대한 '가치'는 의식을 가진 영혼으로서 지천을 떠도는 것보단, 하나의 나만의 신체를 가지고 내 기억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책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면, '나는 왜 나인가'라는 파트가 있다. 그 부분을 읽다 보면, 우리가 나로 생존하며 살아가는 가치가 무엇인지. 육체 관점이든 영혼 관점이든 인격 관점이든 모두 확실말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스스로 생각할 뿐이다. 나의 가치는 나만의 신체와 나만의 생각으로 몇십 년간 쌓아오고 있기에,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잃고 싶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by. UD(유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500일의 썸머: 이건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