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연 Dec 21. 2021

행복의 나라로

케이크와 파이가 흐르는 그곳

 한동안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정신과에서 나눈 대화에 꿈에 대한 내용이 빠진 적이 없었다. 꿈의 줄거리가 무엇이었는지 보다,  내용이 기억나는지의 여부, 꿈을 언제쯤 꾸는  같은지, 꿈과 잠에서 한꺼번에 깨어나는지 , 그것이 발생한 방식과 현상에 대한  위주였다. 꿈은  기억나지 않는 것이  좋은 현상이라고 했다. 보통  좋은 꿈과 부정적인 의식의 재생은 훨씬  생생하게 기억하게 되는 편이고 꿈을 통해 그런 경험을 자주 한다면,  악몽을 자꾸만 꾼다고 느낀다면  마음의 상태를  자세히 돌봐야 한다고.

 누구에게나 그런 것일지, 기억에 더 오래 머무르는 것은 좋은 일보다는 불행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 나에게 좋은 일은 무형의 에너지, 따뜻한 공기 같아서 그 수나 무게를 잴 수 없는 아련한 감정으로 머무르고, 불행하거나 우울한 일은 정확한 속도와 압력으로 또렷하게 돌진해 오곤 한다. 나쁜 일들에 대한 경험은 더 강하고, 그 생각을 떨쳐내기도 더 어렵다. 그것이 해소되는 데에도 더 많은 시간이 든다. 반면, 좋은 일은,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속도가 아쉽도록 빠르다.

 감정을 기록하는 것은 마음이 좋을 때 보단, 마음이 어둡고 불안할 때 더 도움 된다. 불안감이나 분노를 정확하게 글로 내려놓고 바라보면 대략 그것이 어떤 규모의 감정인지, 그게 어디서 오는지 파악하기가 쉬워지고 어디서부터 이 감정을 추슬러야 할지 판단할 수 있다. 더 많이 쏟아낼수록 좋다. 감정이라는 데이터를 시각화, 음성 화하여 더 분명하게 읽을 수 있게 된다. 방을 가득 채우는 유독 가스를 이리저리 휘젓기보단, 작은 불씨를 끄고 깨어진 유리컵을 치우는 것이 더 쉽듯.

 반대로 기쁨의 감정은 형태 없이 나부끼는 대로 두는 편이 마음에 든다. 좋으면 좋은 대로 더 증폭될 수도 있는 마음에 애써 논리를 더하고 근원을 찾으려다, 그 좋은 감정을 간소화, 축약하면 상당히 부질없고 의미 없는 것으로 변해 버리기도 한다. 치약 속 계면활성제가 만들어내는 거품처럼 부풀어진 기분일지라도, 야박하게 소금과 물로만 이를 닦으라고 다그칠 필요는 없는 게 행복의 감정이니까.

 케이크를 만들다 엄청 화가 나는 경우도 있고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한 덩어리 크게 차지하고 있는 답답한 그 감정을 경험하지 않으면서 나머지를 가질 수는 없을까? 그럴 수가 없다. 작고 형태 없는 좋은 일들이 싫은 것 없이는 따라오질 않는다. 재밌는 것은, 내가 케이크를 굽고 쿠키 반죽을 만들면서 느끼는 번갯불 같은 양극단의 감정은 비 온 뒤 무지개, 고생 끝의 행복, 빛과 그림자의 관계처럼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존재한다는 논리와는 다르다는 이야기다. 결코 어려운 과정이 있었다고 해서 좋은 결과나 즐거움이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뜻. 몇 번이고 망치고, 해도 해도 안 될 수가 있다. 하나를 이루면 또 해봐야 하는 것이 또 있다, 영원히 어렵다.

  준비가 안돼서, 또 뭐가 잘 안 풀려서 답답한 때. 필요한 물건이 안 보여 온갖 도구를 다 꺼내어 찾다가, 그 불편함이 지속되다 보면 상당히 많은 시간을 그 기분으로 보낸다. 아직 상온이 안된 찬 버터를 머랭에 믹스하면 우둘투둘한 버터크림이 되어서 믹서볼을 데워야 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무작정 3배 더 오래 믹스해야만 한다. 캐러멜을 태웠을 때 낭비되는 것은 재료뿐만이 아니다. 다시 나가서 생크림을 사 와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고 작은 불편함도 무척 어렵게 느껴진다. 분명 누군가를 탓해야만 하는데 그렇다고 자책은 하기 싫어서 감정의 화살이 엉뚱한 곳, 모든 곳을 향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케이크는 망치고, 나는 화를 내며 울고 있다. 그렇게 주말의 노을이 내 머리 위로 지나간다.  아무도 알아줄 필요 없지만, 내 역경을 몰라주니 화도 나고 다들 대체 주말에 편하게 누워서 뭘 어떤 대단한 인생을 이루겠다는 것인지 이 바보들이. 자꾸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뭐랄까, 아주 쓰고 텁텁한 복수심만 생기는 것 같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그 와중에서도 느끼는 나만 아는 작고 좋은 경험들을 놓치지 않아야만 한다.

 '작은 순간'들이 있다. 내 마음이 좋아지는 그런 일들이 생겨 나는 때. 예를 들어, 쿠키를 구울 때 팬 위에 얹는 종이 포일을 여러 번 쓰고 나서 버리는데, 반복해서 구워진 종이 포일은 아주 건조해져서 접거나 구기면 얇은 페스츄리 한 겹 마냥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겨진다. 아주 마르고 엷은 느낌의 종이가 되고 느끼하지 않게 내 손을 떠난다. 믹서를 사용하다 믹서 볼 안 재료를 실리콘 주걱으로 긁어모을 때, 남김없이 깨끗하게 잘 모일 때가 있다. 주걱 손잡이나 소매 끝에 묻히지 않고 야무지게 재료를 모아 담았을 때 마음이 개운하다.  커드나 캐러멜을 만들다가 좀 부족한가 싶어 조금 더 끓여야 하나 망설이는 짧은 찰나에 금방 망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기 전, 조금은 부족하다 싶은 그때 불을 꺼서 정확히 만들고 나면 기쁘다. 그리고 마침 그것을 담을 딱 맞는 크기의 유리 용기와 그 뚜껑까지 없어지지 않고 준비되어 있다면, 그날은 확실히 좋은 날이다.  사용하기 두 시간 전쯤 잊지 않고 미리 꺼내 놓은 실온의 버터로 편안하고 번거롭지 않게 재료에 믹스하거나 팬에 기름칠을 쉽게 할 때도 무척 흐뭇하다. 레이어 케이크를 만들다 작은 스패출라가 당장 필요해 근처의 서랍을 열었는데 눈앞에 그것이 있으면 그것도 그런대로 기분 좋은 순간. 그런데, 다행스럽다고 느끼는 이 순간들은 너무 순식간에 지나고, 지속되지도 않을뿐더러 바로 잊어버리곤 한다. 작은 안도의 한숨 이상도 아니다. 하지만 기억하기 어려운 이 작은 순간들에, 내 안의 꼬르륵 에 귀를 기울이고 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행복하기 위해선 생각보다 많은 애를 써야 하고 또 치열해야 한다. 행복하기 위해 때론 사활도 걸어야 한다.  


  베이킹을 하면서 만든 것들은 종종 주변에 나눠주곤 했었다. 가까운 사람, 가깝지 않은 사람, 모르는 사람들 까지.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보물 같은 같은 쿠키가, 본인 인생에선 별 의미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 반응들이, 그리고 반응의 부재가 참으로 가혹하게 느껴져 왔다. 나에게는 맛이 좋은 이 과자 하나가 그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나 케이크 한 조각으로 누군가를 내편으로 계몽하는데 실패했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단지 내가 있는 곳에 나와 같은 바보스러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지 않음에 무척 외롭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될 것을 포기하지 못해 한참 슬픈 길을 돌아서 온 뒤에야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축복하고 같은 것에 행복해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너무 가깝기도 또 멀리 안 보이는 곳에 있기도 하는 사람들. 그러고 나서야 내가 만드는 쿠키 하나, 파이 한 조각에 의미는 끝없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 간단한 것을 몰라서 그동안 무척 외로웠다. 좋다는 사람과 나누면 될 것을, 굳이 메아리도 없이 조용해져 버리는 꽉 막힌 골짜기에 냅다 소리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함께 사랑할 수 있는 이들이 있는 시간과 공간을 찾는 것이 나의 새로운 목표다.

 게임을 한다고 치자. 세계관이 화려한 요즘 게임 말고 90년대의 콘솔 게임이 주는 시각적, 청각적 느낌이 적절한 것 같다. 그 게임 속의 나는 산책을 하며 다양한 곳에 가고 매번 새로운 일을 맞닥뜨려야 한다. 아름다운 새의 소리를 따라가 보고 시원한 물도 받아 마시지만 진흙탕 웅덩이에 발이 쑥 빠지기도 하고 때론 괜한 도움을 주려다 큰일에 휘말려 억울한 상황을 경험한다. 하지만 중간중간 진귀한 물건을 찾기도 하고 계획 없이 들어선 길 끝 펼쳐진 잔디와 꽃밭을 만나게 된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려 그걸 다시 찾느라 반나절을 낭비했지만 그건 지나간 일이고 나는 군데군데 노란 꽃이 피어있는 넓은 잔디를 가로질러 가고 있다. 내가 가는 방향 저 앞에 낮고 무거운 먹구름이 보이지만 잘 기억해 뒀다 피해서 가면 될 것 같다.

 쉽지는 않다. 미련이 남아 자꾸만 주위를 살피게 되고 그래도 브라우니 하나, 쿠키 한 조각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아껴두었다가 이것으로서 진정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들의 손에 전달하는 편이 내가 어렵게 만든 행복을 낭비하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겠지. 행복을 만들고 이것이 아깝게 버려지지 않게 하는 것은, 작은 불씨가 꺼지지 않고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되도록 애쓰는 것만큼 노력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겠다. 그 길에서 내 선택과 나아가는 방향에 의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나를 지치게 하는 순간들에 무용담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 영광과 영웅담을 떨궈내지 못한 채 점점 더 무거워지는 짐을 지고 다닐 수도 있고, 아니면 다 제쳐두고 저 멀리 꽃 밭이 보이는 곳으로 가서 그곳의 벌과 나비를 구경할지.

그곳에 닿으면 나와 같은 것을 사랑하고 그것으로 인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 나와 그들을 위해 살고 싶다. 피곤해진다 하더라도, 내 행복과 기쁨을 위해 사활을 걸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모르면 모르는대로 케이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