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연 Jan 02. 2021

과거의 내가 새로이 만드는 케이크.

페퍼민트 초콜릿 케이크

더 자주, 더 다양한 디저트 사진들을 보고 싶다면 
아래 링크로 방문해주세요. 
JAENYEOBAKE 



 간단하게 쿠키를 만들어 보려고 베이킹을 시작했을 때, 레이어 케이크나 파이를 만들 수 있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파운드케이크 정도까지만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했다. 얼떨결에 사와서 올려놓을 곳도 없어 바닥에 둔 오븐에 처음으로 구운 것은 초콜릿 칩 쿠키. 오븐 중간 랙에 넣으라는 말에 내 오븐이 얼마나 작은 지는 생각도 않고 정말 오븐 중간 랙에 넣어 구웠다. 13분이면 다 구워진다는 레시피의 지침도 믿기 어려워 15분, 17분 마음대로 굽고 미련하게 오븐에 달린 다이얼 타이머만 믿고 딴생각을 하고 있다가 바스러질 정도로 너무 구워져 버린 쿠키가 내 첫 베이킹이었다. 거만함과 성급함, 섣부른 판단까지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전형적인 초보였다. 한 번에 멋지게 되질 않으니, 이게 집에서 하는 베이킹의 한계인가?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내심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뭐든 한 번에 안되면 소질이 없는 거다 단정 지어 버리던 경향이 있었다.

 이후, 관심 있는 것들을 이것저것 만들어 보며 내 한계치를 늘리려고 애써보게 되었다. 쿠키, 타르트, 파운드를 만들 수 있게 되니 파이도 되고, 2단 케이크도 가능해졌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쉽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보다는 멋지고 수준 높은 디저트를 만들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지냈다. 완벽하게 굽고 채워진 에끌레어를 만들어 보고 싶고, 화려한 파이핑이 돋보이는 케이크 장식도 해보고 싶어 진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조건들이 그것을 어렵게 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왜 그렇게 완벽한 디저트의 모습을 만들어내고 싶어 안달이 나는지 모르겠다.

 투박하게 만든 세트와 단순한 촬영 기법, 최소한의 특수 효과를 이용해 아름다운 영화를 찍는 감독 미셸 곤드리는, 어린아이의 어설픈 홈비디오 같은 편집을 아무렇지 않게 주요 장면으로 사용한다. 이런 어설픈 장면들은 종종 완벽하게 구현된 진짜 같은 환상의 세계보다 훨씬 섬세하게 우리의 자잘하고 아픈 감정들을 쑤신다. '우와 대단하다, 멋지다'라는 탄식보다는, 보고도 말을 잇지 못하게, 잊고 싶은 기억 속으로 자꾸 돌아가게 만드는 장면들이 그렇다. 나에겐 완벽한 케이크를 만들 의무나 책임감이 없다. 사람들의 기대도 실은 내가 만들어낸 덫 같은 것이다. 하나의 쿠키가 완벽한 구움이 아닐지언정 디저트를 대하는 사적인 마음과 괴상 망측한 아이디어들로,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면 된다는 것을 자꾸만 잊는다. 어차피 나는 완벽한 까눌레를 구울 수 없고, 또 유명 셰프의 손으로 만든 듯 완벽하게 반짝이는 타르트도 만들기 어렵다. 그런 것까지 집에서 만드냐는 말을 들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미술을 했고 또 옷도 만들 줄 알지만 그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 당시에 내가 원했던 표현의 도구가 그것이었기 때문에 그림도 그리고 바느질도 했을 뿐이다. 내가 수도 없이 버터크림을 만들어 봤던 이유도, 더 자유롭게 이 툴을 다루는 것으로 더 다양한 모양을 망설임 없이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고, 상상 속의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나의 베이킹을 위한 다짐 첫 번째, 모두의 베이커 말고, 나 자신의 홈베이커가 되기로 한다. 내 집은 나의 이야기이고 그 안의 세계와 여정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나뿐이니 그 안에서 하는 베이킹은 다른 사람의 것을 따를 필요도 없고. 밖에서 직장에서, 남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은 얼마든 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이해시켜야 하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

페퍼민트 가나슈, 초콜릿 케이크 시트, 페퍼민트 버터 크림, 샌딩 슈거

 종종 신기한 타르트링이나 프랑스산 실리콘 몰드 같은 전문가 디저트 툴에 홀려 이것도 사볼까 저걸 만들어볼까 하며 장바구니를 채웠다 비웠다 한다. 결국에 하는 생각은, 이렇게나 용도가 제한적인 작은 도구 하나하나가 모여 크지도 않은 집의 공간을 야금야금 차지해 가는 것이 맞는 방향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냥 표준 케이크 팬 몇 개, 쿠키 시트 몇 개만으로도 할 수 있는 홈베이킹이 무궁무진한데 더 이상 자꾸만 휘황찬란한 기술과 도구에 현혹되지 않기로 했다. 홈베이커가 가지는 한계와 귀여운 고난들 속에서 미셸 곤드리의 영화 같은 디저트를 만들고, 판매하기엔 너무나도 부족하고 불안한 케이크를 선물하고, 또 맛있는 쿠키를 모르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내 베이킹의 2021년이 되면 될 것 같다. 결국은 원래 전에 하던 대로 하겠다는 말이지만 사실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을 알고 있으니 그 정도면 꽤 야심 찬 계획이 아닐까 싶다. 이미 커져버린 나의 베이킹 자아를 진정시키고, 아무도 무엇을 이루라고 채찍질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방에서 하는 베이킹을 하겠다.

 
 한 가지라도 이해하기 위해 상당히 자주 그것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또 경험을 여러 번 해야 그게 나에게 자연스러워진다. 아무리 많이 해봤던 것이라도 익숙하지 않고 해도 해도 처음 해보는 느낌이 든다. 정말 수없이 많이 해봤기에 익숙한 파운드케이크나 피넛버터 쿠키 같은 것들이 있다. 그러데 때론 쿠키를 구우려고 준비해놓은 도우를 베이킹 시트에 올릴 때, 분명 여러 개를 한 번에 구워도 서로 달라붙지 않을 정도 자리가 있는데도 굳이 간격을 많이 두고 조금씩만 굽는다. 이러면 더 여러 번 구워야 하고 효율성은 떨어진다. 알면서도 내 경험과 감각에 신뢰가 없고, 이상하게 오늘은 그러면 안될 것 같다고 매번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이 올 때마다 (그러니까 매우 자주) 약간은 다행스럽다. 이렇게 매번 하는 일도 어색하고 이상하니 하상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다. 내 손과 동작에 재밌는 긴장감이 항상 머물고 있다.

 살면서 누구나 깨닫는 것을 나도 깨닫는 데 있어서 남들보다 조금 느린 탓에 나는 세상에 대해 조금 더 희망적일 수 있지 않나 생각하곤 한다. 어차피 알아야만 하는 이 세상의 슬픈 모습들을 조금 천천히 알아가게 되는 편이라 염세적인 생각이 찌들어 기계적으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자주 만들어 본 쿠키가 낯설고, 수십 번도 만들어본 파운드의 모양이 매번 다르고, 케이크 크기에 일관성이 없으면 어떤가. 나는 케이크 만드는 기계가 아니고 우리 집은 공장이 아닌데... 나의 두 번째 다짐, 항상 지금처럼 매번 새로운 기분으로 케이크를 장식하고 쿠키를 굽기로. 길에서나 다른 사람 집에 가서 고양이를 보면, 수없이 다녔을 길과 매일 보는 자기 집을 마치 처음 온 곳인 것처럼 관찰하고 행동한다. 약간은 긴장도 되겠지만 모든 것이 새롭고 이상한 기분이지 않을까. 첫 번째 경험만큼 구체적인 감정이 있을까? 모든 순간을 그렇게 살아간다면 약간은 겁에 질린 고양이처럼 정신 나간 기분이 들겠지만 적어도 지루하진 않겠지.


 종종 또 뭘 만들어 볼까 생각하다가 이건 너무 간단하고 저건 너무 복잡하고, 지난번에 생각해 놓은 건 뭔가 재미없을 것만 같고 이렇게 시간만 보내곤 한다. 영화 보려고 넷플릭스 메인 화면만 한 시간 구경하다 끝나는 상황 같은 것들이 베이킹을 하려고 하다가 일어난다는 소리다. 시간 날 때마다 스케치해놓는 케이크들은 대부분이 스케치로만 남아 있다. 이게 참 이상하면서도 뻔한 것이, 그려놓고  몇 번 보면 새롭지도 재밌지도 않아서 케이크를 만들 기회가 되면 예전에 즐거워하며 그려놓았던 케이크는 안중에도 없어진다. 내 생각에 그게 그렇게 좋은 태도는 아니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그러면 케이크를 그릴 때 생각과 이야기가 담긴 케이크를 그리는 게 아니라 얻어걸린 귀여운 컬러와 모양들을 찾는 것일까? 우연찮게 그려진 기발한 케이크들이 무의미한 스케치로 남은해 시간이 갈수록, 또 그런 그림들이 늘어날수록 내가 만들 수 있는 케이크는 점점 더 줄어드는 것 같다. 그래서 또 한 가지 다짐, 케이크는 하루의 마지막의 쓰는 일기처럼, 그 날 일어난 것을 당일 기록하듯 더 생생하고 즉각적인 감각들이 가득한 케이크를 만들고자 노력하겠다. 내가 이 세상 안에서 느끼는 수많은 기분들이 달아나기 전에 그것을 기록하고 케이크로 만들어내어 다시 한번 그 감정을 느끼고 결국은 없어지지 않을 자국으로 남게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그렇게 내 감정을 꺼내고 표현하고 나면 더 새로운 감정들을 받아 들일수 있고, 또 나는 그렇게 무한한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일 년 넘게 만들어보자 생각만 했던 페퍼민트 케이크를 만들어 보았다. 쉽게 사기 어려운 페퍼민트를 구해서 우려내 가나슈를 만들고 추가적 장식도 했다. 단순한 외관에 비해 조금은 번거로운 작업이었지만, 시간을 들여 재료를 소싱하고 속재료를 만들어, 몇 시간 냉장하고 장식해 완성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니 마음도 리셋되는 기분이 들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미리 재료를 준비하고 다양한 과정을 거쳐 케이크를 만드는 것이 당연했고 그것이 내가 홈베이킹을 하는 이유였는데, 어느새 그게 달라져 있다.. 당장 나가서 필요한 재료를 사고, 재료 준비를 했다면 충분히 더 많은 베이킹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을 지금 당장 빨리 만들 수 있는 것, 번거롭게 새로운 재료를 찾아봐야 하지 않는 디저트를 찾으며 그걸 탐색하는 일에만 시간을 쓰고 있었다. 약간은 번거로운 단계들과, 그것이 모여 케이크가 되고 그 과정을 빛나게 해 줄 케이크를 디자인을 하는 것은 빠르고 생산적인 베이킹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그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서 수행하는 수고는 당연하면서도 즐거운 모험 같은 것들이었다. 페퍼민트 케이크는 그런 태도로 돌아가기 위해 만들 수 있는 훌륭한 케이크였다. 신선한 페퍼민트 허브를 짓이겨 향을 내고 살짝 끓인 크림에 우려낸 뒤 한번 식혀 두 시간을 더 진하게 우려내 준다. 그것을 다시 조금 데운 후 화이트 초콜릿에 부어 가나슈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케이크 시트는 진한 초콜릿 케이크. 식혀 놓은 케이크 시트와 한번 휘핑해 가볍게 만든 가나슈를 레이어 번갈아 레이어 한 뒤,  민트향을 더한 스위스 머랭 버터크림으로 아이싱하고 입자가 굵은 샌딩 슈가로 표면을 장식하면 된다.


 한국에서도 홈베이킹이 보여주기 위한 개인적 취미가 아닌 보편적인 삶이 되는 날이 온다면 좋겠다. 생일엔 집에서 직접 만든 케이크로 축하 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초대받은 저녁 식사 자리에는 피칸 파이를 들고 방문하는 것이 일상인 세상. 누구든 늦은 시간 야식으로 냉동실 안 미리 만들어 놓은 쿠키 도우를 꺼내 구워 먹는 것이 일반적이고, 크리스마스 디너 때 디저트 코스에 대해 열띤 논의를 하는 사람들의 대화. 그렇다고 홈베이킹이 너무 유행해버리는 것도 원하지는 않지만, 때로는 너무 특별한 기술처럼, 전문가처럼 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아쉽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우리가 자라온 방식은 베이킹이 삶의 중요한 부분 인적이 없었고, 고사리 손으로 서툴게 쿠키 도우를 만 들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미 세련되고 멋진 디저트를 많이 접한 뒤 나도 만들어보자 싶어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바보스럽게는 싫고, 그래도 멋지게 해보고 싶은 것이 요즘 사람들의 마음이려니 싶다. 우리 집에서 만드는 브라우니의 맛과 느낌보다는, 누가 맛있다고 해서 찾아가 본 베이커리의 브라우니로 한 가지 디저트의 인상이 정해지고, 그곳이 수많은 이에게 정답으로 알려지며 줄 서는 '맛집'이 되고 만다. 다양한 느낌의 브라우니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베이킹을 하며 무슨 아이템이든 꼭 어디 가서 배워와서 하거나 꼭 어떤 자격증이나 수료증으로 연결시키려는 성향이 있다. 이게 반드시 생산적인 결과물이 된다던가, 업이 되어야 한다던가, 유튜브 수익이 된다던가 해야만 하는 그런 우울한 열정 같은 게 있다. 열심히는 하는데, 꼭 이뤄야 하는 게 있어 마음 편히 불태우지 못하는 조건적 열정. 그래서 하고 싶은걸 하다가도 힘이 들고 슬퍼지는 것 같다.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가 자격증이라는 것도 있다고 한다. 누구에게 증명하려고 그런 것들이 생겨나는지 모르겠다. 목표 없이 단지 즐겁기 위해 하는 쿠키 만들기와 케이크를 하기 위해, 더 목표 없고 이유 없는 베이킹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 언제 어디를 가던 한 손에 오늘 아침에 구워 놓은 파이를 들고 나타나는 친구가 되고 싶다. 베이킹 많이 하는 그 사람, 그 언니, 그 친구로서의 모습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싶다.


 절박하지 않은 일에 대한 사람의 의지라는 것 꽤 약해서, 정말로 중요한 일이 아니면 스스로 만든 어떤 다짐이나 약속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대단한 체중 감량이나 꾸준한 독서 이런 것들을 해내는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실로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 때문이다.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회는 매일 매 순간 우리가 무언가를 오늘도 반복해서 또 하기로 하는 순간 생겨난다. 그래서 새해 첫날의 다짐은 중요하지 않다. 오늘 다짐하고 하루, 내일 다짐하고 이틀, 매일매일 다짐해보는 것이, 끝이 보이는 목표를 향해 가기보단, 그저 영원히 해나가는 것이 답인 것 같다. 3개월간 꾸준하게 뭘 한다고 생각하면 그 3개월은 영겁처럼 느껴질 것이고 그저 매일 숨 쉬듯 한다고 생각하면, 잊고 있던 사이 나는 내가 그리던 그것에 더 가까워지겠지. 내가 시간을 흘려보내며 나도 모르게 변해가듯, 그 흐르는 시간 안에 작은 물결을 만들다 보면 고통스러운 절박감이나 속박 없이 어느새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거나 내가 좋아하는 지금의 나로 살아갈 수 있겠지.

 그래도 한 가지 새해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골치가 아파도 더 절박한 마음으로 새로움을 바라보고, 더 강하게 느끼고 원하고 바라는 사람이 되는 것.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려 만든 조금은 어른스러운 맛과 단순하지만 영롱한 모습의 페퍼민트 케이크는, 처음 베이킹을 하던 내 모습을 찾아가는 새해를 시작하기 위해 만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케이크였다.

작가의 이전글 내 나름의 우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