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연 Sep 22. 2021

모르면 모르는대로 케이크

체리 피스타치오 케이크

 


책을 읽다 쉬다 다시 읽고 또 쉬는 사이 내용을 잊어버려서 또다시 읽느라 끝나지 않는 마지막 챕터 마냥 좀처럼 끝나질 않는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이 길고 긴 계절이 영원할 것이라는 암담한 마음과, 결국은 오고야 말 새 계절에 대한 설렘이 뒤섞여있던 지난 2월. 십 년 가까이 알고 지낸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어른이 되어 만난 사람을 친구라고 부르기 어색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언제라도 연락하면 망설임 없이 만날 수 있고 만나서도 어색하지 않게 몇 시간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분은 맞지만, 이렇게 전화를 하고 받는 사이는 아니기에 대답도 물음표가 두 개 붙은 여보세요??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본론으로 들어간 그는, 곧 동업자와 함께 카페를 오픈한다며 디저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1년에 두어 번 연락을 주고받을까 싶고, 자기 생활을 소셜 미디어 등에 드러내는 편도 아니기 때문에 그동안 그의 삶에 대해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하필 이런 때에 멀쩡한 직업, 괜찮은 삶을 두고 갑자기 카페라니? 이야기를 들어보니 연락이 뜸했던 지난 1년여간 커피며 차, 와인에 대해서 여기저기 다니며 배우고 공부했다는 것이다.

 카페는 서울 용산 어딘가에 오픈할 계획이고, 공간도 꽤 멋지다고 한다. 대체적인 설비와 가구 등은 직접 만들거나 주문 제작했다고 한다. 가게 이름은 어떻게 할 것이고 이런 아이템을 판매할 예정인데 거기서 판매할 디저트에 대한 상담을 하고 싶다고 했다. 언제 오픈 예정이냐고 물으니 '3주 조금 안 남았다'라고 한다. 이럴 수가. 몇 달씩 준비해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음식 장사인데, 3주 이내로 디저트를 결정해서 확정해야 한다니? 놀란 마음을 감추고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대신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섞인 대답이  나왔다. '어려울 텐데...'

 며칠 후, 아직 준비 중인 카페를 찾아갔다. 도로를 에워싼 새 고층 빌딩들 속 빈 사무실들은 가득 찬 형광등 불빛을 뿜어내고 있다. 큰 도로를 따라가다 낡은 상가 건물들이 있는 길로 꺾어 들어가니 휑한 2차로 골목길이 나타난다. 알려준 주소지에 도착하니 애매하게 낡은 건물이 보였다. 아주 낡지는 않았지만 오래되긴 했다. 1층에는 이미 카페가 있는 데다 엘리베이터 없는 5층이라 접근성도 없는데 괜찮을까? 평소에도 일부러 계단을 이용하지만, 막상 어둑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려니 어색하다. 5층에  다다르니 카페는 보이지 않고 굳게 닫힌 철문만 보인다. 휑한 동네의 평범한 건물, 차가운 계단과 철문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찾아가고 싶은 카페가 있는 곳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다. 어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예상치 못했던 널찍하고 탁 트인 공간에 이어 곧바로 벽 두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창문, 아니 그보다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 풍경에 눈에 들어왔다. 평일 퇴근을 마치고 찾아간 것이라 피곤했던 눈에 차가운 안약 한 방울이 떨궈진 느낌. 평범한  듯 하지만 어딘가 독특한 의자와 테이블, 어디서 본 재료지만 특별하게 사용하고 마감한 나무 소재들이 눈에 띈다. 스스로 했다길래 소박하고 엉성한 매력을 주제로 하는 것일까 상상했던 것은 잘못이었다.

 낯선 곳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설렘과 긴장감이 뒤섞인 목소리로 해주는 설명을 들으며 동시에 눈으로는 빠르게 이곳저곳을 관찰했다. 직접 디자인하고 특별 제작했다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카페에서 판매할 디저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디저트를 하고 싶냐고 물어보니 까눌레와 다쿠아즈, 치즈 케이크를 하고 싶고 베이킹은 잘 모르지만 직접 만들 것이라고 한다. 까눌레도 본인이 직접 구우면 될 것 같다고 한다. 화들짝 놀라 까눌레는 제대로 만들 거면 정말 쉽지 않으니 하려거든 납품을 받는 게 어떠냐고 거의 말리듯 조언했고 다쿠아즈는 여기 분위기와 잘 안 맞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러냐며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뭘 하더라도 생산과 관리가 쉬운 것으로 하라며 내가 아는 레시피도 알려주기로 했다. 디저트 담당 직원을 반드시 뽑는 게 좋을 거라는 첨언도 했다. 음료 제조와 서빙은 누가 할 것이냐고 했더니 본인들이 직접 할 것이고, 저녁 시간 와인과 판매할 음식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에서 이것 보단 저게 낫고 이런저런 선택지가 있을 것 같다는 조언과, 가능한 선에서 내가 최대한 도와주겠노라는 이야기까지 하고 그곳을 떠났다. 걱정이 앞서는 것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랜 시간 변함이 없고 편해서 좋아하는 사람인데, 오래 준비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어쩌나.

 카페를 오픈 한 다는 것, 그동안 조용히 준비 해왔다는 것, 이런 공간을 찾았다는 것 보다도 놀라운 것은 전문 분야도 아닌 것들까지 DIY로 해왔으며 앞으로의 운영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그들의 자신감이었다. 사실 한편으로는 그게 자신감이라기보다는 모르는 게 약이 된 경우가 아닌가 생각했다. 창 밖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이 근처에 인기가 대단한 카페가 몇 군데 있다고도 말한다.

  그 이후 종종 진행 상황에 대한 소식을 받았는데, 원래 계획대로 3주 후에 카페를 열지는 못했다. 두 사장님이  스스로 하는 게 많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런저런 업체를 추천해 주고 납품을 알아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픈 전 어느 날, 자기가 만든 까눌레가 나쁘지 않다는 얘기를 했다. 결국 하는구나, 그러면 프랑스산 구리 몰드에 왁스칠까지 일일이 해서 정말 그렇게 만드는 거냐고 물으니 그건 아니고 쉽게 만들 수 있도록 나온 코팅 팬에다 만든다고 한다. 분명 내가 가진 딱 한 번의 경험과 견문으로는 진짜 까눌레는 그렇게 할 수가 없을 텐데... 본인의 업장에서 판매할 제품이 본인 마음에 든다는 것에 특별한 딴지도 걸 수 없었다. 저녁 시간대의 셰프도 구했냐고 물으니 아직이란다. 그냥 자기네가 할까 한다고 한다. 그쯤부터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걱정이 없는 사람에게 굳이 짐을 얹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오픈전에 자주 들러 디저트 생산 테스팅도 하고 이런저런 도구들을 주문해 카페로 보내다 보니 어느덧 오픈날이 되었다. 어찌 되었는가 물어보니 아직 여유롭지만 신기하게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고, 분위기가 긍정적이라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곳은 주말이면 전 테이블이 꽉 차는 카페가 되었다. 달리 직원도 없었던 두 사장님이 진땀을 빼며 일하고 있었는데, 대기하는 손님까지 생겨났다. 투박함과 정돈된 모습이 어우러진 이곳은 어느샌가, 멋지고 독특한 공간으로 유명해져 그야말로 '요즘 잘 나가는' 카페가 되었다. 이렇게 저렇게 굴러가는 정도가 아니라 화제의 카페가 되었고 심지어 까눌레가 맛있는 집으로 알려졌다. 최고의 까눌레, 까눌레가 맛있는 카페라는 언급이 후기에 심심치 않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숨 돌린 가벼운 마음에 가만히 많은 생각들이 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가게를 열고 사업을 시작하기에 정말 어려운  시기에, 그것도 주변 경쟁 상대가 있는 지역의 엘리베이터 없는 5층에 카페를 연다는 이야기에 누가 선뜻 좋은 생각이라고   있겠나. 가게 목이 좋고 운과 타이밍까지 따라줘도 불안한 비즈니스를 아무것도 확신할  없는 상태로 개시한다는 것은  고난자처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불안한 예상을 깨고 카페는 지금 까지  달째 성업 중이다. 카페를 연다고 하니 ‘갑자기 ? 지금?’, 엘리베이터 없는 오래된 건물 5층이라니 ‘누가 오겠어?’ 집기도 스스로 만들었다는 말에 ‘ 수나 있는 것일까?’, 까눌레를 직접 만들어 판다는 말에 ‘쉽지 않을 텐데?’, 모든 것이 섣부른 판단이라 생각했던  주관이야 말로 우스운 기우였다. 챙겨야 하는 자잘한 것들을 짚어가며, 이런 것은 어떻게 해결할 거냐는 질문에 ‘하면 되지 않을까?’라고 자신감으로 일관하던  사람의 표정이 보여준 것은 단순히 낙관적인 자신감이 아니었다. 어려움이 있을 것을 인지하지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만들고, 만들  없다면 구하고, 구할  없다면 다른 선택을 하는 행동력에 대한 확신이었다. 수많은 일거리 하나하나를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민해가며 모든 단계를 무거운 짐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나에게도 가능할까?   있을  같아서 하는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해서 하고 마는 실행력이 나에게 있을까?  해본 일은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것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노력을  지구력이 있을까? 디저트를 만들고 싶다면 스탠드 믹서가 필요할 것이라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믹서를 구매하고, 재료는 이걸 쓰고 도구를 이런  사라는  조언들 까지 그렇게 실행에 옮겨 버리고 기어코 멋진 카페를 열어 운영하는  사람의 과정.

 짧았던 봄이 지나고, 딱 얼굴 찡그리지 않을 정도로만 따뜻하게 느껴지는 초여름의 공기가 느껴지기 시작하면 내 생일이 온다. 올해도 내가 원하는 대로 나와 남편, 그리고 강아지가 셋이 보내는 작은 저녁을 위해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테이블 위에 초콜릿 케이크가 올려져 있다. 귀여운 접시에 투박하게 바른 초콜릿 아이싱과 사랑스러운 스프링클 장식. 믿기 어려운 광경에 연신 해대는 질문 '이게 뭐야?!' 남편이 멋쩍게 웃으며 자기가 만들었다고 한다. 분명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준비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중 하나가 케이크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예약해 놓은 레스토랑에 가서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돌아와 하이라이트 순서. 이걸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었다고? 수차례 묻고 확인하다 맛 본 케이크는 내가 살면서 먹어본 케이크 중 손에 꼽힐 정도로 맛이 좋았다. 요리는 잘해도 베이킹과는 거리가 먼 남편의 어색한 시도는 그야말로 홈런이었다. 맛있고 고맙기도 했지만 베이킹이라고는 평생 두어 번 해봤을까 싶은 남편의 케이크가 이렇게 맛있다니, 여태 난 뭘 잘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남편의 정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의심 가는 구석이 있어 케이크를 먹으면서 어떤 레시피인지 당장 알려달라고 조용히 취조했다. 표정으로 드러나는 어색함에 계속해서 물으니, 실은 미국산 박스 믹스 케이크(미리 건 재료만 믹스해 종이 패키지에 담은 제품으로, 달걀과 액체 재료만 더해 쉽게 케이크를 만들 수 있도록 파는 제품)라고 실토했다. 내가 미국식 박스 믹스나 슈퍼에서 파는 아메리칸 버터크림 아이싱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하던 것을 기억해 뒀다가 어떻게 구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 대답에 어떤 실망이나 '그럼 그렇지!' 같은 생각보다는, 박스 믹스가 이렇게나 맛있다니, 그동안 내가 해온 노력은 가치가 있기는 할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그보다 더 의아한 것이 초콜릿 아이싱이었다. 이건 또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 그것 만큼은 본인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미국식 아이싱을 만들려고 했는데 슈가 파우더를 찾지 못해 방법을 고민하다가 Ermine Frosting이라는 것을 찾았다고 한다. 일반적인 버터크림과는 만드는 방법과 재료가 기본적으로 다른 이 아이싱에는 미국식으로 슈가 파우더나, 머랭 베이스 버터크림에 들어가는 달걀흰자도 들어가지 않는다. 20세기 초반부터 전해지는 밀가루와 우유를 되직하게 끓인 다음 휘핑해서 만드는 오래된 방식의 아이싱이다. 이것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있지만 밀가루를 넣어 만드는 방법이 생소하고 어떤 맛일지 상상하기 어려워 시도하지 않았는데, 남편은 그냥 되는대로 해봤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아이싱이 정말 상상을 초월하게 맛있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초콜릿 푸딩 같으면서 느끼하지 않다. 분명 믹서가 필요했을 텐데 그것은 어떻게 했냐고 하니 그냥 거품기로 빠르게 휘핑했고 레시피에 나온 코코아 파우더는 너무 많은 것 같아 적당히 줄여서 넣었다고 한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케이크 시트는 내가  만들어보거나 먹어본 그 어떤 시트보다 부드럽고 가벼웠다. 아이싱은 풍부한 초콜릿 맛이 딱 알맞게 달고 푸딩처럼 부드럽지만 부담스럽지도 않은 맛이었다. 가볍고 맛있는 케이크에 완벽하게 어울린다. 꼬장꼬장 까다롭게 레시피를 골라 잘 갖춰진 도구들과 정확히 계량한 재료로 열심히 만들어도 내 맘에 딱 드는 케이크를 만든 적이 없었는데 케이크 박스 믹스와 이 대안제 같고 생소한 아이싱으로, 별다른 스킬이 없는 남편이 만든 케이크가 이렇게 맛있다는 것. 올해 내 생일은 이런 대단한 것을 알게 된 것으로 기념했다. 어떻게 해보지도 않은걸 할 생각을 했냐니까, 그냥 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했다고 한다. 케이크 만드는 일이 상상했던 것보다는 오래 걸려 진땀 빠졌지만 어떻게든 해결은 되더라고. 빠르게 휘핑해야 했을 텐데 스탠드 믹서는 어떻게 썼냐고 하니 그냥 손으로 마구 휘핑했다고 한다. 박스 믹스 케이크를 먹어 본 지 너무 오래되어 그 맛과 감촉도 기억나지 않아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미국식 케이크와의 랑데부를 이렇게 하게 되었다. 한 조각에서 멈출 수 없는 위험한 맛 까지도 내 상상 그대로였다.

 완벽하게 준비가 안되거나 수준 미달이라는 생각, 또는 멋지게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할까? 재능이 없을까? 시도하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았나.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했던 일상의 수많은 기회들을 나는 어떻게 지나쳤을까?

  베이킹을 거의 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까눌레를 만들어 팔겠다는 소식에 걱정이 앞선데는 이유가 있다. 몇 년 전 까눌레가 좋아서 그것을 집에서 만들어 보려고 했다. 만드는 법을 배우러 간 까눌레 샵의 주인이자 클래스의 선생님은 본인의 까눌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고 자기 철학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까눌레 저런 까눌레를 비교하며 어떤 까눌레가 가장 좋은 것인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상당히 확고한 가치관을, 까눌레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던 나는 그저 ' 아 그렇구나...' 생각하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정성스럽게 밀랍을 녹여 까눌레 틀 안쪽을 하나하나 정성 들여 코팅하고 까눌레를 굽고 또 정리하는 과정에서 선생님이 강조했던 것은 까눌레 만들기가 얼마나 번거로운 지에 대한 것이었다. 가장 의아했던 것은, 까눌레는 정말 힘드니 팔지 않는데 낫다, 남는 것도 없다, 정 하고 싶다면 납품을 받거나 더 쉬운 제품을 만들라고 연신 조언하던 것이었다. 고온의 오븐에서 나오는 연기를 환기하는 시설도 설치해야 하고 많이 다치기도 한다며. 가정에서 만드는 것에 대해 물어보니, 반드시 고가의 프랑스산 동 틀을 사용해야 하는데 해외 주문으로만 살 수 있고 가격이 너무 비싸 추천하지 않는다고, 구한다 하더라도 가정용 오븐에서는 아마 수준에 못 미치는 품질일 것이라고 했다. 숨기지 못했던 내 표정을 선생님도 봤을까. 까눌레를 만들고 클래스에서 가르치기도 사람이 이렇게 까눌레에 비관적일 수가 있나, 조금 코믹하기까지 했다. 문득 오래전에 보았던 코미디쇼에서 한 셰프가 다양한 과일을 별, 하트, 동그라미 등의 모양으로 정성 들여 자르도록 한 뒤 그것을 그대로 믹서기에 넣어서 갈아버리던, 콩트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그때의 경험으로 인해 까눌레는 반드시 좋은 바닐라 빈과 비싼 럼주를 넣고, 동 몰드에 왁스 처리를 해 좋은 고가의 오븐에서 섬세하게 만들어야만 하는 제품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까눌레를 만들어 파는 것은 뜯어말리고 싶게 된 것이다. 까눌레로 유명한 업체를 소개해주며 요즘 여기가 유명하더라며, 꼭 납품받는 방향으로 알아보라고 하는 내 목소리에서 몇 년 전 까눌레 클래스의 경험이 묻어났을까. 어느덧 카페 오픈이 가까워지고 그렇게 카페 사장님의 손에서 까눌레가 구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이곳의 까눌레에 대해 이야기하는 손님들이 생겨나고, 유명한 디저트 전문점 오너의 호평을 받게 되었다. 이게 되는구나. 식음료 사업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친구는 오직 커피와 공간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손수 땅을 다듬었다. 1년 넘게 공부하고 발로 뛰며. 나라면, 내가 만든 청사진을 실현하기 위해 내 손으로 직접 마른땅의 잡초를 뽑고 돌을 골라낼 수 있었을까. 그보다는 가장 먼저 누구에게 일을 맡길지, 예산은 얼마일지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어디서 구했냐고 하니 직접 만들었고, 저건 어디서 주문했냐고 하니 직접 설계하고 용접만 맡겼단다. 하나하나 짚어가며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그렇다. 이 카페엔 어디서 본듯한 집기나 가구가 거의 없다. 익숙한 형태에도 처음 느끼는 이상한 에너지가 있어 이 공간에 처음 방문했을 때와 어느 정도 시간을 보냈을 때의 기분이 다르다. 이미 봤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낯설고 새롭게, 마치 특별하게 주문 제작 한, 단순하지만 멋진 옷 한 벌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공간 구석구석 어설픈 곳이 있고 세상에 있는 흔한 재료를 가지고 가구를 만든다 하더라도, 하나하나에 그의 가치가 투영되기 때문이다.

  까눌레를 직접 만들고, 가구를 디자인하는 일들. 너무 몰라서 또는 쉽게 보고 자신감에 넘쳐, 해보지 않은 것에 무턱대고 도전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이야기다. 본인이 얼마나 모르는지도 알고 있고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감도 없지만 일단 해보고 배우고 알게 되는 과정에 대한 확신이 그 핵심이다. 열 번 백번 시도해서 만들어지는 것들, 잘하고 싶은 것이 있어 그것을 반복하고 연습해 기술이나 실력을 얻게 되는 과정은 너무 분명하다. 이 당연한 순리의 첫 발자국을 디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너무 잘 아는 것, 너무 모르는 것, 부족한 자신감, 부족한 인내심, 게으름, 자만심, 실패를 두려워하는 나약함. 학생일 적, 한 교수가 종종 하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더 경험이 쌓이고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지금 하고 있는 근거 없는 상상과 무턱대고 하는 새로운 시도들은 점점 더 못하게 된다. 안되거나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또 어떻게 해야 빠르게, 쉽게 할 수 있는지 잘 아는 만큼 예술가가 할 수 있는 표현의 범위는 줄어든다. 그러므로 많이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편이 낫다. 그것이 많은 것을 쉽게 만들어준다.

 누군가가 태어나 처음 만들어 보는 생일 케이크가 이렇게 완벽할 수 있는 데에 필요한 것은 경력이나 경험, 대단한 테크닉이 아니었다. 목표나 바람이 있고 그것을 이루어야 하기에 처음일지라도 해보는 일들, 실패와 리스크를 염두에 둔 시도, 나의 부족함을 마주쳐도 당황하거나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다.

“체리 피스타치오 레이어 케이크”

 과일 재료를 이용한 케이크를 만드는 것은 왠지 모르게 번거롭고 어려운 것 같아 몇 년을 피하다, 제철이 되어 맛 본 체리 맛이 좋아서 꼭 케이크에 넣고 싶어졌다.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다 몇 년 전 일본 출장에서 팀원들과 헤어져 혼자 찾아간 과자점에서 먹은 디저트가 생각났다. 슈 속을 크림으로 채우고 그 위엔 피스타치오 크림을 얹은 뒤 생 체리를 몇 개 얹은 디저트였다. 대단히 새로운 디저트는 아니었지만 피스타치오나 생 체리를 넣은 디저트를 처음 먹어봤기 때문에 놀랍기도 했고, 그때서야 피스타치오의 맛을 이해하게 되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나 생각난 그 맛을 만들어 보고 싶어서 제철이라 맛이 좋은 체리와 껍질을 벗긴 생생한 연두색의 피스타치오를 구해 케이크를 만들었다. 크림은 남편이 만들어준 생일 케이크의 ermine frosting으로 하기로 했다. 기본적으론 바닐라 버터크림이지만 거기에 체리와 어울릴 아몬드 향을 더하고 과일의 향을 극대화하기 위해 체리향의 키르시 리큐어를 조금 넣었다. 아몬드 케이크에 곱게 간 피스타치오를 섞으니 꽤 멋진 연둣빛 케이크가 구워졌다. 처음으로 케이크 옆면에 크림을 바르지 않은 naked cake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무스띠를 사용 하다 크게 실패했던 적이 있어 걱정이 많았다. 무스링 안에 높은 무스 띠지를 두르고 케이크와 크림을 담고, 체리의 자른 단면이 보이도록 촘촘히 두르는 것을 반복하고 맨 위를 크림과 피스타치오 장식, 줄기를 떼지 않은 체리로 장식했다. 냉장고에서 두 시간 정도 굳히고 조심스럽게 무스 띠를 떼어내 본다. 내가 만든 것 중 이렇게 완전하게 내 마음에 든 케이크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아무리 애써도 깨끗하게도, 계획대로도 되지 않던 케이크 장식이, 무턱대고 처음 시도해 본 방식의 케이크에서 이렇게 멋지게 나오다니! 가장 멋진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맛있는 케이크라는 것이었다. 피스타치오의 향, 신선한 체리, 그리고 체리향을 닮은 아몬드 익스트랙의 맛이 느끼하지 않은 새로운 아이싱과 무척 잘 어울렸다. 연둣빛 케이크 시트와 하얀 아이싱, 영롱한 체리가 차례로 쌓여 이뤄낸 깨끗하고 멋진 케이크. 오랜만에 만든 케이크에, 또 이렇게 멋지게 나온 결과물에 엄청나게 기쁜 마음이었다. 다음에는 또 어떤 곳으로 리스크를 감수한 여행을 떠나게 될까.  

 

작가의 이전글 마라시노 체리에 대한 단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