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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May 21. 2023

유랑기 ③ 타지에서 느낀 나의 낯선 존재감

2022년 2월 4일 일기 발췌

미국에서의 첫 학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한국에서 나를 보러 와준 언니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첫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그러니깐 나는 학기 중반부터 이미 학교로부터 멀리 떠날 준비를 한 것이다. 누군가 나의 첫 학기가 어땠는지 물어본다면 한마디로 혼돈 그 자체였다. 나는 첫 OT 날 철학과 세미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나를 쳐다보는 외국인 얼굴들에 흠칫 놀래서 다시 밖으로 뛰쳐나와 내가 제대로 찾아 들어갔는지 다시 확인하고 들어갔다.


나는 영어를 거의 못했고 악센트 있는 영어를 거의 못 알아 들었으며 논문도 읽히지 않았고 혼자 사는 것도 처음이었고 미국 대학 시스템도 처음이었다. 무척 어려웠다. 한국에 있는 내 친구들과도 거의 단절된 채 나는 침대에 누워서 몸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나 자신이 무섭게 무너졌다. 나는 외로운 이방인이었고 정차 없이 떠도는 들짐승이었고 불안과 우울 속에 스며드는 칼날을 품고 다녔다.


나는 내가 지닌 날카로운 칼날이 나에게 내리 꽂히는지도 모르고 몸을 몸짝달싹도 못하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표적이었다. 붉은 태양이 넘실거리는 푸른 밤이 계속되었다. 어둑해지기도 전에 나는 오늘도 하루를 일찍 감치 미리 끝내버린 것에 대해 비참해야 할지 아니면 안도해야 할지 몰라서 자꾸 멈칫거렸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컴컴한 밤이 찾아왔다. 고난과 고통은 한밤중에 불현듯 나의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온다.


여기가 나그네의 집이오? 잠시 머물러 가겠소, 그대가 고향에 돌아갈 일은 없소. 다시 떠돌아야 할 테니 말이오. 다시 짐을 꾸려 떠날 준비를 하시오. 그대는 떠나기 위해 떠나야 할 것이오.


밤마다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다시 깨어났다. 내 몸에 머리가 여전히 잘 달려 있음에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아, 아직 죽지 않았구나. 아직 살아있음에 환호했다. 질문이 멈추지 않아, 생각이 멈추지 않아. 다시 돌아가 내가 애써 스쳐 지나온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왜 다시 돌아온 거야? 바람이 나에게 물어봤다. 여기 뜬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 내 몸은 이미 넘어갔지, 저 멀리 다른 언덕으로 말이야. 내 영혼은, 내 프시케는, 내 한 줌의 한 숨은 왜인지 여기로 다시 자꾸 돌아와. 여기, 여기, 여기에. 내 영혼이 다시 떠돌아 온 거야. 저 멀리 보이는 내 육체에게 되돌아가게 바람을 힘차게 불어줘.

다시 되돌아 갈래,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다시 달려 나갈 준비를 할 거야. 나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존재야. 멀리멀리 다시 떠날 채비를 마치고 움직일 거야.


아, 나는 그리 꿈꾸던 노마드의 삶을 살아가는구나. 노마드의 삶에 이 애달픔이 섞여 있는 줄 알았다면 나는 이 길을 선택했을까? 나에게 내가 묻는다. 네 삶이 이리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있다면 나는 이리도 애석한 젊은이의 패기를 넋 넣고 부채질했을까?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무엇을 묻고 싶은 걸까? 물어봐, 물어봐봐, 물어보라니깐. 나는 여기 앉아 있어, 쉬는 중이야. 어디까지 나아갈 생각이야?


나는 저 너머 산을 건너고 다른 큰 산을 또 넘어보고 넘어가다가 첩첩산중이 산산첩중으로 변하고 다시 무너지고 약해진 지반을 조심스럽게 건너다가 끝내 어딘가에 도달할 모양이다. 나는 그곳에서 내 가족을 만들 것이다. 내 집, 내 가족, 나만의 왕국을 그곳에 세우고 또 세워 나의 그들이 쉴 수 있는 안전한 쉼터가 되어 줄 것이다. 다시 떠날 준비를 해야지, 여기에 안주하기엔 세상이 넓고 넓으니 말이다.


잊지 마, 너는 어디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방인이었어 여기서나 저기서나 모두 나는 항상 낯선 타자로서만 공간을 점유할 수 있었다. 나의 이질감은 나의 무기가 될지 아니면 치명적인 약점이 될지 두고 보면 밝혀질 일이다. 밝혀지면 나의 존재값은 비로소 알려지겠지. 나를 쳐다보지 마, 의식하지 마, 무엇도 묻지 마. 그 뒤에 나는 찬란하게 빛날까? 빛이 나서 모두를 밝혔으면, 밝히고 밝혀 여기 모두 존재하는 그들에게 빛을 선사하였으면. 나는 여기 와서 저기까지 갈 아주 튼튼한 다리를 가졌으니 걱정 말고 떠나시오. 나는 떠나온 것이다.


 

대체 텍스트: 창문 너머로 박제된 희색의 뿔 달린 사슴이 보인다.

상황 설명: 미국에서의 첫 학기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언니와 근교로 여행까지 다녀왔다. 여전히 내 영어는 어설펐으나 관광 명소에서는 유창하게 영어 실력을 뽐냈다. 여행까지 잘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다음 학기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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