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집합이 없는 대화에서 논리적인 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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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집합이 없는 두 집합의 생각은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까?
집합 A의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과 집합 B에 속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대화하고 논쟁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가능은 하다. 그러나 교집합이 없기 때문에, 집합 A와 집합 B의 담화는 아무것도 생산해 낼 수 없다. 집합 A에서는 집합 A의 원소만이, 집합 B에서는 집합 B의 원소만이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의미있는 담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논리적인 해결책이 있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집합을 새롭게 정의해서 교집합을 만드는 방법이다. 그러나 애당초 교집합이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새로운 집합을 탄생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둘째 집합 A와 집합 B 사이의 담화가 아닌 전체집합 U로 담화를 변경하는 방법이다.
손오공과 저팔계가 자신이 신봉하는 교리를 설명하면서, 한 사람은 기독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은 부처님의 법을 설파하기 위해, 서로를 설득하면서 대화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의 담화는 종교이다.
손오공: 기독교 성직자 혹은 독실한 신자
저팔계: 스님 혹은 불교에 귀의한 자
기독교와 불교는 교집합이 없다. 기독교는 예수를 주로서 섬기는 종교이다. 예수를 주로 믿으면 기독교요, 예수를 주로 믿지 않으면 기독교가 아니다. 그런데 불교는 예수를 주님으로 믿지 않는 종교이고 석가모니가 가르치는 불법佛法에 따르는 종교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불교와 교집합을 갖지 않는다.
누군가 이의를 제기한다.
그들이 반문하기를 기독교와 불교 모두 보편 종교로서 사랑과 관용 등의 덕목을 가르치지 않느냐는 것이며, 그런 공통점을 교집합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덕목은 종교가 없는 사람도 내세우는 가치라는 점에서, 또한 그것들이 기독교를 기독교라는 집합으로 구획하고, 불교를 불교라는 집합으로 정의할 때의 요소가 아니라는 점에서 채택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교간 대화를 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하고 있다. 서로 존중하고 함께 가치있는 일을 벌일 수 있다. 기독교를 믿는 손오공과 불교를 신봉하는 저팔계는 언제든지 교제하고 함께할 수 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전체집합이다.
예를 들어 손오공과 저팔계는, 본인들이 믿는 종교를 대표하며 교리로 관계를 맺는 자가 아니라, 인류에 속한 자로서 대화하고 함께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관용 같은 덕목은 두 종교의 교집합이 아니라 두 종교가 속해 있는 — 도덕법, 인류애, 혹은 보편 종교 등 — 전체집합의 요소들이다.
다시 말하면 손오공은 기독교라는 생각의 집합으로 불교도인 저팔계와 대화하는 게 아니다(만약 그렇다면 교집합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생산해낼 수 없고 서로의 건너갈 수 없는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저팔계는 불교의 교리로 기독교를 믿는 손오공을 설득할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대화한다.
담화는 집합 A와 집합 B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집합 U에서 이루어진다. 명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전체집합 U를 생각의 크기로 삼게 되면, 종교의 차이는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다. 만약 전체집합을 생각해 내지 못한다면 종교의 차이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옛날에는 종교의 차이에서 비롯된 참혹한 전쟁과 살육이 많았다. 지금도 지구촌 어딘가에서는 전체집합을 생각해 내지 못한다. 시야가 좁은 사람들은 도처에 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얘기이지만, 두 종교 사이에 교집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그것의 실질은 교집합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의 탄생이다. 예컨대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되 주님의 가르침을 석가모니의 가르침으로 대체하는 종교를 상상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런 신흥종교를 만들지 않더라도 두 종교가 속하는 전체집합을 요청함으로써 두 종교 사이의 담화가 잘 진척될 수 있다.
논리 교훈:
교집합이 없는 경우의
두 생각 집합 사이에서 행해지는 대화는 생산성이 없다.
두 집합이 모두 속하는 전체집합을 불러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