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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Jan 11. 2023

엄마는 엄마다

논리학에서 술어논리의 의미

논리는 주어가 주도하는 것일까

아니면 술어가 주도하는 것일까


논리와 문법은 다르다. 논리는 인류의 머릿속에 누구에게나 이미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생각의 형식이다. 반면 문법은 인간이 표현한 언어에 규칙을 부여한 형식이다. 논리는 인간 머릿속에 선천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고, 문법은 논리 규칙을 참고하여 인간이 후천적으로 약속한 것이다. 논리는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머릿속의 형식을 곰곰이 떠올린 다음 그것에 맞게 생각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문법은 타인(문법학자)이 발명한 약속을 암기해서 소통하는 작업이다. 논리가 문법보다는 간단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논리를 주어와 술어의 관계로 이해했다. 


논리에서 말하는 ‘술어’는 

문법의 ‘서술어’와 같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손오공은 사오정을 비난했다>


라는 문장에서 서술어는 ‘비난했다’이고, ‘사오정’을 목적어로 분류한다. 하지만 논리에서는 목적어를 따로 분리하지 않고, ‘사오정을 비난했다’ 전부를 술어로 본다. 


논리란 서로 다른 무엇을 

'머릿속에서' 연결하는 것이다. 

연결하는 것이 있다면 연결되는 것이 있다. 


연결하는 것이 술어이고, 

연결되는 것이 주어이다. 


연결하는 것이 없다면 연결되지 않는다. 연결되는 것이 없다면 역시 연결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무엇이 이 연결을 주도하는 것일까? 연결하는 것이 주도할까, 아니면 연결되는 것이 주도하는 것일까? 주어는 이미 주어져 있다. 아직 아무것도 연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술어는 없는 것이다. 이렇듯 연결이 없다면 주어만 있고, 주어만 있는 세상에서는 주어만 존재한다. 그런 주어를 단어라고 일컫기도 하고 개념어라고 부르기도 하고 존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그런 주어가 여러 개 서로 연결되지 않은 채로 어딘가 존재한다면 그 어딘가를 집합이라 부른다. 이제 이 주어에 어떤 연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그때 같은 집합 속에 있던 술어들이 주어를 향한다. 


주어는 있을 뿐이요, 연결은 술어가 주도한다. 그래서 논리학에서 주어의 역할은 ‘있음, 어딘가에 있음’ 이외에는 없다. 술어가 주어를 결정하고, 규정하고, 한정하고, 성격을 부여한다. 어떤 술어가 연결되느냐에 따라 주어의 특징이 달라진다. 주어의 변화는 술어가 정한다. 술어에 의해 주어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래서 논리는 ‘술어 논리’가 되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술어 논리를 알아 보자. 주어에 주어를 연결하는 것이다. 


<엄마는 엄마다>


술어는 주어와 같다. 자기가 자기와 연결됐고, 같은 것이 두 번 연결됐다. 우리는 방금 전 술어는 주어를 결정하고 주어를 변화시키며 주어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엄마>와 <엄마는 엄마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엄마>는 사전이 정한 단어의 뜻만 있다. 그러나 <엄마는 엄마다>라고 했을 때 어떤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는 무엇일까? 논리적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논리는 인류 공통의 생각의 형식인데, ‘A = A’로 표현되는 이 형식에서 ‘A’라는 주어의 있음 외에는 빠진 것도 추가된 것도 없고, 이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저 엄마인 것이다. <엄마는 엄마다> 같은 문장에서는 ‘논리적으로는’ 연결이 없다. 어떤 술어가 주어 ‘엄마’에 연결됐다고 보기 어렵다.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 


여러분과 내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점에서 같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다르게 생각한다. 어째서 인간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일까? 생각의 형식은 같지만 생각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그 내용을 각자의 경험이 만들어 낸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엄마는 엄마다>라고 했을 때 동일한, 동일할 수밖에 없는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 떠오르는 <엄마는 엄마다>와 내가 연상하는 <엄마는 엄마다>가 같지 않게 된다. 주어의 ‘엄마’는 엄마라는 개념이지만, 술어 위치의 ‘엄마’는 여러분과 나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만들어 내는 감각 이미지가 사람마다 달라진다. 


사람들의 경험에 따라 어떤 이에게는 긍정적이고 풍성한, 어떤 이에게는 부정적이고 앙상한 감각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머릿속에서 생겨난 이런 감각 이미지에 의해 다른 술어와의 연결 가능성이 사람마다 달라진다. 이렇듯 주어에 자기 자신을 술어로 붙이면, 주어에 대한 이미지들이 환기되고, 그것은 의미가 같음에도 의미가 사람마다 달라지는, 모순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엄마는 엄마다>는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철학자들은 이를 ‘동일률’이라고 부른다), 누구에게나 논리적으로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논리학에서는 더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 예술, 심리, 사회 분야에서는 다채롭게 다뤄진다. 


<엄마는 엄마다>


주어와 주어를 잇는 이런 문장은 아주 간단한 연결이다. 논리적으로는 연결이라 하지 않고 ‘분석’이라 표현한다. 주어를 분석하기만 해도 된다는 의미다. 심지어 동물도 머릿속에서 이런 수준의 분석을 할 수 있다. <엄마는 엄마다>와 비슷한 주어와 술어의 연결이 있다. 


엄마는 자식을 가진 여성이다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

독약은 독이 들어 있는 약이다

한국어는 한국사람의 말이다

먹을거리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위와 같은 문장에서 술어는 주어 ‘엄마’,  ‘총각’, ‘독약’, ‘한국어’, ‘먹을거리’의 의미를 분석해서 풀어주기만 한다. 논리적으로는 마찬가지로 ‘A = A’에 해당한다. 주어 A를 분석하기만 하면 A를 설명할 수 있다. 이런 형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쉬운 일. 그런 단어를 외우기만 하면 된다. 저절로 외워지든 애써서 암기하든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여러분은 주어(엄마, 총각, 독약, 한국어, 먹을거리)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다. 이런 문장을 일컬어 분석명제라 한다.


논리 교훈:
주어는 존재할 뿐이다. 술어가 주어에 연결돼서 주어의 존재 방식과 성격과 다양한 특징을 결정한다. 그래서 논리는 주어가 아닌 술어가 주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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