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새로운 한 페이지가 열리고 사랑의 화려하고 경쾌한 악장은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었다. 막이 내리면 우다왕은 원자를 떠나게 될 것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채마밭과 화단, 포도넝쿨, 부엌 그리고 부엌 안에 있는, 표면상으로는 정치와 무관하고 마오 주석의 어록도 새겨져 있지 않으며 위대한 초상과 혁명의 구호도 없는 솥과 그릇, 젓가락과 채소 바구니와도 헤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점거하고 자신의 모든 혈액과 세포 속에 단단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류롄과 헤어져야 했다. 지금 그는 이러한 이별의 그의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지 알지 못했고,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어떤 영혼의 고통이 매복되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서부터 180도 다른 방향으로 발전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인간의 운명이란 항상 쾌락이 극에 달하면 슬픔이 생기고 극도의 격정 뒤에는 항상 긴 적막과 우울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류롄은 말한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고. 마오 주석의 혁명 구호가 새겨진 팻말을 옮겨놓으면 우다왕은 이층으로 향한다. 류롄의 향긋한 침실로 향한다. 그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고 있다. 류롄도 인민을 위해 복무하고 있다. 그러나 그 둘의 인민이 과연 같은 의미였을까. 그들의 성애가 (차마 사랑이라고 부를 수가 없는) 인민을 위한 것이었다면, 우다왕의 인민은 류롄 그 자체였을 것이고 류롄의 인민은 우다왕의 몸을 빌려 잉태한 아이일 것이다. 그 아이는 사단장의 아이로 클 테니까. 우다왕이 류롄의 첫 번째 명령을 거절했을 때, 류롄이 지체 없이 다른 신병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그녀가 우다왕을 원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두 달이 다 지나갈 무렵, 류롄이 우다왕의 귀를 파주고 우다왕에게 음식을 해주었을 무렵에는 그녀의 마음이 어디로 기울었을지 알 수 없으나,
우다왕에 대한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마오 주속의 어록을 찢고 그의 흉상을 바닥에 내동댕이쳤지만 류롄의 인민은 결국 우다왕이 아니었을 거라고,
그런 예감이 들었다. 슬픈 예감이.
류롄이 우다왕에게 말했던, "인민" 또한 그녀 자신이 아니었으리란 생각도.
하나로 완벽하게 합쳐진 것처럼 보였던 어떤 밀월의 시간들이 사람을 얼마나 황폐하게 하는가. 복무의 시간이 끝나고 우다왕은 그가 원하던 도시 호적을 갖는다. 군대에서 나와 더 형편이 좋은 직장을 얻는다. 아내와 아들도 도시로 나와 그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러나 우다왕은 류롄을 아는 몸이 되었다.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무참하게도 그는 흘러가버린 그 시간에 영원히 닿지 못한다.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동원해 국가 단위의 잔인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는 중국의 역사를 때려 부쉈고 사람들에게 맹목적인 헌신의 의무를 강요했다. 그런 시간들이 사람이라는 하나하나를 얼마나 잔인하게 파괴하는지 우리는 알고 또 모른다. 우다왕의 평생은 인민을 위해 복무했던 두 달로 완전히 망가졌다. 그는 행복을 잃어버렸다.
"인민"은 스스로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순진한 우다왕은 알지 못했다. 우리가 복무해야 할 무엇이 있다면 첫 번째는 스스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커다랗고 무시무시한 것이 늘 우리를 가스라이팅 한다. 기쁨과 행복을 마음껏 누리는 것을 죄스러워해야 할 것처럼. 마치 그것은 예쁜 리본을 묶어 누군가에게 선물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때로는 맞서 싸울 힘마저 잊게 한다. 처음부터 그럴 기회란 없었다는 듯이. 그런 야만의 시간이 있었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인류세가 지속되는 한 항상 그럴 것이다.
예민한 작가의 시선과 섬세한 문장이 커다랗게 외친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복무해야 할 무엇이 있다면 그건 나, 나의 시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