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함을 인정하고 시작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성인 취미 피겨는 2023년 3월에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아이스링크에 가려면 큰 맘 먹고 가는, 1년에 스케이트를 한번 탈까 말까 하는 사람이었다. 안양빙상장 주말 단체강습의 첫 날이 생각난다. 처음 와보는 낯선 링크에서, 최소 1년은 배운 것 같은 고수들 사이에서 혼자 허우적대던 첫 강습날.
안양 링크는 기초-초급-중상급 이런 식으로 레벨이 나눠져 있는 걸로 알고있고, 내 수준이라면 기초반에 갔어야 했다. 수강신청을 하러 홈페이지에 들어갔는데 기초반이 금방 마감되고 초급반에만 자리가 남아있어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마음으로 등록을 했었던 것 같다. 좀 아쉽긴 하다. 기초반에 가면 신발 신는 법부터 걷고 넘어지는 것도 배웠을텐데.
'처음이지만 초급이니까 괜찮겠지-'하는 마음은 상당히 안일한 마음이었다. 말이 초급일 뿐, 엣지는 기본으로 쓰는 숙련자가 정원 20명 중 절반 이상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단강을 들었던 게 올해 7월이었는데, 그때는 이제 초급반에서 조금 숙련된 사람들은 중급반으로 보내 커리큘럼을 막 재단장하던 시기였다. 그렇게 되니까 나한테는 수업이 정말 편안하더라.. 그 이전에는 내가 엣지를 지금보다도 더 못 썼으니, 다같이 함께 타는 하프써클이 나 때문에 교통체증이 걸려버리는 바람에 난 항상 열외되곤 했었으니까.
쓰다보니 추억에 잠겨서 내 취미 피겨 일대기를 다 쓸 기세다. 아무튼 요약하자면 제로베이스인 상태였지만 단체강습을 시작해 5개월간 듣다가, 단강 선생님과 개인강습으로 전환해 이제 4개월차로 아주 귀여운 초보 피겨인이다.
배우면 배울수록 피겨는 어렵다. 어릴 때 배웠던 게 아니라면 기술의 퍼포먼스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바로 그 점이 내가 취미로서 피겨를 좋아하는 이유다.
발레나 폴댄스도 마찬가지지만, 뭔가... 뭔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저 퍼포먼스를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저 멋진 결과물이 눈 앞에 아른거리고,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거든. 하지만 피겨는 얄짤없다. 어릴 때부터 점프를 위한 지상 훈련을 하고 얼음 위에서는 하네스로 더 많은 회전을 훈련해온 사람과, 다 커서 배우는 나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하체가 튼튼하더라도 이미 몸이 무거운 상태이기 때문에 성인 피겨는 싱글 점프까지만 뛰어도 잘 하는 거라고.
차준환 선수처럼, 점프 후 랜딩할 때나, 스핀을 돌다가 빠져나올 때 주로 하게되는 백아웃인데 평소엔 그렇게 안되더니 지난 주 금요일 강습땐 이게 갑자기 되는거임. 선생님이 잡아주지 않으면 1초도 유지하기 힘들었는데 3초 이상을 유지하고 있으니 내가 하면서도 내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왜 되는건데..
'나는 원래 못해', '내가 지금 선수만큼 연습한다 해도 한계가 있어'라고 인정하고 시작한 취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 전혀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저 그날그날의 레슨 분량을 군말없이 반복할 뿐이다. 그러다가 목표했던 동작을 얼떨결에 성공시킨다. 그랬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짧은 시간이지만 취미로 피겨를 배우면서 '난 이거 왜 안돼ㅠ'라며 속상해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한다면 슬럼프같은 건 없다. 오히려 더 노력하고 즐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지난달 겪은 발태기 역시 '내가 좀만 더 잘 하면 될 것같은데' 라는 헛된 희망(?) 때문에 생긴 일이었지(물론 지금은 다 내려놓고 재미있게 하는 중이다).
일도 마찬가지로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10년의 경력이 있지만 그건 회사 소속이었을 때고, 독립한 후 내 브랜드를 만드는 것은-물론 10년의 디자인 경력이 지금 하는 일에 도움을 주지만- 완전히 처음 겪어보는 일이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만 가지고, 주어진 일을 수행하며 꾸준히 하는 게, 이 일을 성공시키는 정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