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뒤에 자리한 희생을 인지하도록 그 시선을 공유한 영화
영화 <사바하>는 악과 선의 모호한 경계를 다루고 있다.
이 측면에서 보면 ‘그것’이 악이고, 저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선이다.
*여기서 ‘그것’은 ‘김제석’의 천적이자 스스로 ‘울고 있는 자’라 칭하는 자다.
‘그것’과 관련된 장면마다 으스스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검은 털로 뒤덮이고 자신의 자매를 물었을 뿐만 아니라, 뱀과 새 등 가축을 부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선보다는 악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진짜 ‘악’은 어쩌면 ‘선’이라 믿었던 김풍사-그는 소년범을 통해 1999년에 영월에서 태어난 여자 아이들 살인을 조종하고, 그의 제자가 편안히 잠들지 못하도록 생명을 연장하며, 죄없는 코끼리도 총으로 쏴 죽인다-에 더 가까울 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쌍둥이 동생 금화가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나헌을 위해 자장가를 불러주며 그에게 안식을 주는 ‘그것’은 어쩌면 선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김풍사가 악이고, 그것이 선이라 가정했을 때, 예언은 정확히 일치한다.
"당신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에 당신이 태어난 땅에서 천적이 태어나 당신을 파멸시킬 것이다."
김풍사가 저지르는 잘못된 희생들을 멈추고자-이미 너무도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천적인 그것이 나헌으로 하여금 김풍사가 죽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도록 만든다.
때문에 <사바하>는 한때 선이라 믿었던 악의 파멸 과정이자 악이라 믿었던 선의 헌신이라 읽기에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게 다일까.
이 영화는 ‘선’이라고 믿는 것에 따르는 희생을 보여준다.
김풍사 입장에서 자신은 선이다. 그는 본인이 세상을 밝힐 등불이라 믿고, 이런 자신이 대의를 위한 불사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 많은 여자 아이들과 기타 생명들을 제거하는 데에 조금의 망설임이 없다. 선을 위한 많은 희생이 과연 참된 선인가.
그것은 ‘울고 있는 자’다. 왜 울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김풍사로 인해 수많은 목숨들이 희생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 혹은 본인은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나 오로지 김풍사라는 천적을 죽이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에서 ‘선’과 ‘악’의 대조가 김풍사와 그것이고, 말미에 이 둘의 의미가 뒤집어 짐을 가정했을 때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선 몇 몇의 희생이 따랐다. 먼저 배 속에서 있을 때 금화의 다리를 물어 영양을 취함으로써 금화의 희생이 있었다. 원치 않은 모습으로 태어났고 그 과정에서 부모가 죽었다. 기이한 마을 분위기를 해결하고자 그것에게 다가간 무당에게 뱀을 통해 상처를 가했다. 그것이 16년 동안 살아가야만 했음으로-그래야 김제석을 죽일 수 있었으므로- 여러 방면의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영화 <사바하>는 어떤 선을 위한 어떤 희생이 가진 이면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풍사의 불사라는 목적을 위해 희생된 수많은 영월의 1999년생 여자 아이들과 그녀의 부모들, 소년범 4명, 김풍사의 제자, 코끼리, 그 외 살인에 희생된 피해자들 그리고 금화까지. 희생에 대한 마주함은 황 반장이 경찰서 게시판에서 수많은 여자 아이들의 실종 포스터를 무기력하게 보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또한 박 목사가 요셉에게 이야기하는 크리스마스의 뒷 이야기에서도 다시 한 번 재현된다.
요셉아 크리스마스가 즐거운 날이니?
당연히 기쁜 날이죠. 아기 예수가 태어난 날인데.
매년 성탄절이면 난 이런 생각을 했어. 사실 이 날은 너무 슬픈 날이라고
무슨 말씀이세요?
아기예수가 태어나기 위해 베들레헴의 수많은 아이들이 죽었거든.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다 라는 동방박사의 예언을 듣고 헤롯왕이 심히 노하여 사람들을 보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역의 사내아이들을 그 때 기준으로 두 살부터 그 밑으로 전부 죽이니...
마태복음 2장 16절..
*마태복음 2장 16절 :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종교에 대한 논의는 수많이 다양할 테니, 이에 대한 이야기는 막론하고 종교는 악보다는 선에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 모두의 믿음일 것이다. 물론 악이 있기에 선이 있겠지만-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태어났으므로 저것이 태어나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 적어도 종교는 악보다는 선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라는 암묵적인 믿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 <사바하>가 보여준 것은 선과 악에 대한 모호한 경계를 넘어 선을 위한 희생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영화가 가진 수많은 의의들이 있겠지만, 내가 바라본 <사바하>는 선 뒤에 자리한 희생을 인지하도록 그 시선을 공유한 영화라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리고 이 희생들에 대해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