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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Aug 29. 2024

오, 나의 여름! (2)

나폴리엔 피자만 있는 게 아니죠

아름다운 항구 도시 나폴리는 온 도시가 옅은 주홍색과 밝은 황토색을 머금고 있다. 이곳이 가지는 분위기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날긋날긋한 멋. 오래된 것이 뿜어내는 친근하고도 낯선 멋이 동시에 존재한다. 다닥다닥 좁은 골목 사이로 널려있는 빨랫줄과, 수도인 로마보다 덜 세련됐지만 더 친절한 사람들이 맞이하는 곳. 투박함 아래에 세심함을 감추고 있는 나폴리는 이태리의 부산이다.



나폴리 중앙 기차역에서부터 바튀 달린 케리어를 로마 시대에 포장된 우둘투둘한 가도 위로 끌어가며 약 20분이 지났을 무렵, 구도심 한가운데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나폴리에 처음 온 남편은 이곳이 소매치기의 메카라며 우리 반경 2미터 안에 있는 이들을 얼마나 경계했는지 모른다. 남편과 달리 타인에 대해 근거 없는 깊은 신뢰가 있는 나는 미어캣 모드로 경계하는 그 덕분에 내리쬐는 태양을 머리에 인채 멀리 있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두 번째 찾은 도시에서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우리가 에어비앤비로 얻은 숙소는 5층짜리 낡은 공동주택이었다. 꽤나 넓은 방 창문 옆에는 작은 발코니가 달려있었고 그 아래로 좁은 길을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좁은 골목길은 뜨거운 태양을 가리는 그늘을 만들어주었고 그 덕에 기온이 높아도 그리 덥지 않았다. 골목 양 옆으로는 관광객의 발길을 사로잡는 상점과 카페들이 즐비했다. 상인들은 골목 밖으로 나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동네 할아버지들도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낡고 오래된 건물과 길, 눈길 닿는 곳 모두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낭만 그 자체였다.


나폴리에서의 첫날은 도시의 주요 관광지를 보는데 할애했다. 먼저 찾은 곳은 나폴리 대성당. 성당 한가운데 성모마리아 상이 여름 오후의 태양빛에 후광을 입고 반짝이고 있었다. 종교가 없는 사람도 잠시나마 신적인 존재를 찾게 되는 성당은 특별한 힘을 지녔다. 성당을 장식한 조각과 천장화, 인간의 예술품들은 그 자체만으로 신을 위한 인간의 마음과 믿음에 경외심을 일게 만든다. 불자인 나도 성령의 은총을 받은 것 같은 충만함으로 성당을 빠져나온 후 한창 거리를 걸었다. 나폴리의 전통 수공예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한 골목들을 헤매기만 해도 나는 낯선 곳의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다섯 시 즈음해서는 로마시대에 지어졌던 지하의 시장을 방문했다. 과거에는 지상이었던 시장터는 도시가 팽창하며 새로 건설되고 퇴적물이 쌓이고 지반이 변화하는 등의 원인으로 오늘의 땅 아래에 존재하게 되었다. 오늘날 개별 가게처럼 벽으로 나뉜 빵집, 은행등의 흔적을 보며 로마시대의 생활을 상상해 보았지만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은 어두운 지하에서도 과거의 이미지를 시각화할 수 있다며 자랑했다. '여보는 좋겠다.' 하며 그를 부러워했다. 과거의 모습을 이미지화할 수 있다니, 어른이 되고 난 후 잃어버린 능력이 남편에겐 그대로 남아있나 보다. 지극히 종교적인 곳과 지극히 세속적인 오래된 두 유적을 방문하며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건 절대 한 곳에 치우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폴리 하면 빠질 수 없는 피자를 저녁으로 먹기 위해 긴 줄을 서 겨우 들어간 식당에서는 우리 부부의 입맛이 도우가 쫀득한 나폴리 보다는 바삭한 느낌의 로마 피자를 더 선호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폴리의 둘째 날은 헤르쿨라네움 방문으로 문을 열었다. 나폴리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40분가량 달리면 갈 수 있는 고고학 유적지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폼페이와는 달리 페르큘라네움은 한국인들에게는 조금 생소한 도시다.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 결과 폼페이 사람들은 뜨거운 화산재에 갇혀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고, 훗날 고고학자들이 뻥뻥 뚫린 땅의 구멍을 석회로 매워 당시 주민들의 비극적인 죽음의 순간을 재현해 낸 것으로 유명해졌다. 폼페이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남부의 해안도시였던 헤르쿨라네움은 베수비오산의 북서쪽에 위치했다. 폼페이의 참혹한 상황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던 그곳 주민들에게도 화산재가 불어닥쳐오면서 급박한 순간, 생존을 위해 해안의 보트저장소에 몸을 피했다. 하지만 화산의 여파는 생각보다 강렬했다. 뜨거운 열기에 사람들의 살과 장기는 순식간에 타버렸고 그들의 유골만이 남아 이제는 땅이 되어버린 둥그런 배 정박지를 지키고 있다. 고대 로마의 가장 번성했던 곳으로 알려진 남부의 해안 도시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자연의 힘으로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한 것을 보며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그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2,000년 전 유적은 굳건하게 서있지만 그곳을 이루던 사람들은 해골이 되어 관광객들 앞에 머무르고 있었다. 인간 문화의 위대함과 인생의 덧없음은 한 끗 차이였다.



고대 유적지가 전해주는 많은 이야기를 뒤로 한 채 다시 나폴리로 돌아온 우리는 또다시 도시를 배회했고, Plebiscito 광장과 갤러리아 움베르토, 에치아 산 전망대까지 돌아다니며 28,000보를 걸었다. 낮이면 해산물 가게였다가, 저녁이면 식당으로 바뀌는 야외 식당에서는 끝내주는 파스타와 홍합 스튜도 먹었다. 식사 후에 남편은 골목길을 거닐다 만난 동네 꼬마들과 축구를 했다. 해가 지고 해변의 거리는 가로등의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여행을 온 사람들이 바다 옆 인도를 따라 마련된 식당들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저마다의 방법으로 여유로움을 즐겼다. 모두가 풍요로워 보였다.



그렇게 나폴리에서 이틀을 보낸 우리는 다음날 아침 또다시 떠날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소렌토로 가기 위해서다. 중학교 시절 음악시간 수행평가 중 하나는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가곡의 가창 시험이었다.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


나는 노래처럼 다시 소렌토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소렌토는 어떤 모습일지 잔뜩 설렘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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