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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Nov 03. 2024

할머니를 바라보며

그토록 바라던 타인의 죽음 앞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바란 적이 있는가.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있다. 그것도 두 명이나.


6년을 사귄 첫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후, 나는 그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받은 상처와 배신감이 마음에 낸 생채기의 크기만큼 그의 신체에 엄청난 고통이 따르길 바랐다. 교통사고가 나서 몸이 갈가리 찢기는, 가장 끔찍한 죽음이 그를 맞이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강물처럼 흐르던 시간은 가슴속 강바닥에 난 상처를 얕은 모래로 덮어 주었고, 거기에 상처가 있었는지도 모르게 괜찮아진 후에는 그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길 바라다 이젠 좀처럼 그가 생각나지도 않게 되었다. 미워하던 사람의 행복을 빌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우리의 삶 속에는 찾아온다.

내가 죽음을 바랐던 또 다른 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할머니였다. 나의 친할머니. 아빠의 엄마. 괴팍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내가 사랑하는 엄마와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그녀를 보고 있으면 ‘언제쯤 돌아가시려나.’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매일매일 하는 욕과 잔소리는 기본이었고, 항상 손을 찰싹 때리거나 잡은 손을 뿌리치는 몰인정한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은 적도 없고 사랑을 준 적도 없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하고 다니셨다.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도 할머니는 기억할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를 나에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큰손녀랑 시장에 갈란다.”

할머니는 공표하듯 엄마, 아빠에게 말했다. 밭에서 따놓은 고추와 고춧잎, 어디서 온 줄 모를 감자를 검은색 봉지 봉지마다 잔뜩 싼 채로.

할머니는 93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힘이 세고 물러설 줄 모르는 여인이다. 그녀는 식구들 먹으려고 심어놓은 고추를 싹 다 따다가 시장에 팔 생각이었다. 돈 쓸 일도 돈 쓸 줄도 모르는 양반이 그렇게 돈에 집착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저 할머니의 마음 깊은 곳에 그녀가 그렇게 해야 하는 심리적 요인이 있을 뿐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해방과 6.25, 한국의 뼈아픈 근현대사를 홀로 오롯이 감당한 것 같이 할머니의 마음은 가난과 설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해버린 풍요의 시대 속에서는 자신이 겪은 세월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항상 무결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자라나 그 자리를 차지했다. 감자는 엄마가 식구들 먹인다고 한 박스 사놓은 것인데 그것마저 팔겠다고 싸놓았으니 아침부터 집안이 소란스러웠다. 아무래도 매일 얼굴 마주하고 싫은 소리를 해대었던 엄마, 아빠보다는 지역축제에 온 가수들을 구경시켜 주고, 짜장면도 사주는 손녀가 더 미더워 보였기 때문에 나를 콕 집어 시장에 간다고 하셨을 거다.

“할머니, 감자는 제가 대전 가지고 가서 먹을게요. 고추랑 고춧잎만 가지고 시장에 가세요. “

그렇게 할머니를 설득해 겨우 감자는 두고선 그녀를 차에 태워 시장으로 향했다.

“감자는 말이야. 사놓고서 먹지도 않아서 썩어 문드러지려고 하는 걸, 그걸 팔겠다는데 웬 야단이고. “

“할머니. 감자를 우리가 먹으려고 샀잖아요. 그리고 할머니 말처럼 감자가 썩었으면 나쁜걸 남들한테 팔면 어떻게 해요?”

“됐다. 요, 요. 앞에 수덕 예식장 앞에 세워도 고. 여기 건너까지 짐 보따리 좀 들어도.”

차가 오가는 바쁜 시장통에 내린 할머니. 장이 서 더욱 복잡해진 4차선 도로를 건너야 했기에 나는 한 손에는 고추와 고춧잎 봉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할머니 손을 잡기 위해 그녀의 손을 향해 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내손을 홱 하고 앙칼지게 뿌리쳤다. 누군가의 도움을 안 받아도 될 정도로 홀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이라도 해 보이듯, 할머니는 손을 매몰차게 패대기쳐버렸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겪어왔지만 잠시 잊고 있었던 그녀의 손짓에 순간 과거부터 쌓여온 모든 짜증이 밀려옴을 느꼈다.

“할머니 차가 많으니깐 손 잡고 얼른 오세요!! “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났다.

“야가 야가 야가 와이라노? 왜 소리를 지르고 이카노?”

할머니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시장사람들 모두 들으라고 하는 소리마냥 ‘와 이라노’하며 계속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할머니를 막 대하고 다그치는 후레자식, 쌍년이 되어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보행자가 있든 없든 횡단보도 위를 쌩쌩 지나치는 몰상식한 차들 속에서 할머니와 함께 길을 건너야 하는 나는 더 신경이 곤두서서 할머니의 손을 잡고서 앞으로 나갔고, 할머니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뒤로 버티며 질질 끌려왔다. 그 복잡한 길을 건너고 나서 가지고 온 고추와 고춧잎 봉지를 길바닥에 놓고 나는 할머니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차가 그렇게 많이 오는데 위험하게 뒤로 넘어지려고 그러세요?”

“야가 또 이칸다. 또 소리친다.”

나를 향한 비난의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건너 차에 올라탄 뒤 길을 나섰다. 호의를 베풀고도 일반적인 통념 속 약한 늙은이 연기로 나를 궁지에 내모는 할머니의 연극적 상황 연출. 기가차고 어이없는 그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이는 모를 거다.


할머니는 옛날부터 그랬다. 초등학교 1학년인 나와 축협에 가서 자신의 주머니 속에 있는 500원을 못 찾아 당황했을 때도, 손녀인 내가 훔쳐갔다고 나에게 자신의 실수를 뒤집어 씌웠다. 중학생인 내 교복을 빨며 ‘내가 식모냐’며 소리 질렀고, 칭찬 한번 한적 없고, 용돈 한번 준 적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작년엔 아픈 외할머니를 보러 가지 말라고 하기까지 했다. 아픈 사람 보면 애가 안 생긴다나. 결혼 3년 차, 아이를 갖지 않은 것은 우리 부부의 선택인 것을. 90이 넘은 이 노인은 손녀가 애를 못 갖는 이유가 아픈 외할머니를 찾아봐서 그렇다는 결론을 내렸고, 세상에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보러 가지 못하게 펄쩍 뛰며 성화였다. 할머니의 만행과 망언을 늘어놓자면 끝도 없다. 동네 할머니들과도 싸워 경로당도 못 나갈 정도의 고약한 성미는 함께 있는 사람을 힘들게 했다. 늘 자신만이 옳은 그녀에게 식구들은 자신의 연장선이 아닌 타인이었고, 망신을 주거나 상처를 줘도 되는 사람들이었다. 늘 엄마를 구박하고, 외갓집에 못 가게 하고, 눈치를 주는 할머니를 좋아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언제 돌아가시나, 손꼽아 기다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야 환갑이 지난 엄마가, 37년간의 시집살이를 청산할 수도 있었고 나역시 집에 가서도 여덟 시까지 늦잠을 잔다거나, 편안하게 누워 TV를 볼 수도 있었다. 늘 눈치를 주는 불편한 존재와 함께 살아간다는 건 매일의 삶이 수행인 것이나 다름없다. 도를 닦는 것과 마찬가지인 그 삶에서 엄마가 벗어나 조금은 편안해 지길 바랐다. 매일이 불평불만인 그녀는 93세이니 돌아가셔도 호상이었다. 그간 아들, 며느리와 함께 아픈데도 없이 편하게 사셨으니 돌아가셔도 나에겐 아무런 아쉬움이 없었다. 그저 빨리 가시길, 못 된 손녀이자 착한 딸은 바라고 또 바랐다.


엄마와 아빠가 막내 동생의 상견례를 위해 이틀간 집을 비운채 대전을 방문하고 다시 영천으로 돌아갔을 때, 할머니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할머니가 밥 먹는 양이 1/3 가량으로 줄었고, 힘이 없는지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꾸벅꾸벅 졸아가며 어떻게든 거실에 조금 더 오래 있으려고 버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바로 방으로 들어가 잠을 주무신다고 했다. 벌써 다 털었을 깨와 콩은 그대로 밭과 마당에 널부러 져있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할머니의 모습에 나는 마음이 이상했다. 불과 3주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딴 고추를 장에 가서 다 팔아 낸 할머니가 갑작스레 쇠약해졌다는 것이 거짓말 같았다.

“암만 그래도, 조금 더 건강하게 살아계시는 게 더 나은 것 같아. 잔소리도 하나 안 하고, 힘 없이 가만히 있는 걸 보니깐 안쓰럽고 안 됐어.”

엄마는 생명의 기운이 사그라드는 할머니를 보며, 그녀가 겪어야 했던 모진 세월을 다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한 인간, 한 여인에 대한 연민이 더 커지며 할머니가 조금 더 사시면 좋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래도 진아. 너랑 추억이 많잖아. 네가 손녀 중에 할머니랑 제일 오래 살았잖아.”

“추억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 그걸?”

엄마의 말에 추억이라는 단어의 뜻이 문득 궁금해졌지만, 나 역시도 야위어가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녀를 향한 걱정스러운 마음이 솟구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은 못된 행적을 지녀도 가여워 보이는 것인지. 그렇게 미워하던 할머니가 어쩌면 정말 곧 돌아가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어렵게 살아온 그녀의 삶이 너무 고단했음을, 그 삶의 고단함이 그녀를 모나게 만들었음을 조금 더 기억해 내고 포용하고 이해할 걸 하는 마음이 들었다. 죽음. 삶의 끝은 응당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인데 막상 내 유전자의 1/4을 이루고 있는 할머니가 세상에 없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후련할 것만 같았던 그녀의 부재가 눈앞에 다가오니, 그녀에 대한 연민과 기껍지 않은 슬픔이 함께 찾아왔다.

할머니와 상극인 아빠 역시 갑작스레 약해져 버린 할머니를 보고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늘 효도를 엄마에게 미뤄왔던 아빠의 눈에도 할머니가 쇠약해진 것 같아 보인다면 끝이 다가오긴 했나 보다. 그토록 미웠지만 병원 신세 지지 않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잔소리를 해대다가 곱게 가실 준비를 하시는 게 한편으로 고마운 할머니다. 할머니의 앙칼짐과 고집, 못된 성미를 나도 물려받아 늘 물렁하지만은 않고, 할 말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 점도 감사할 일이다.

주변인들을 괴롭혀 사람을 내쫓고 스스로를 외롭게 만드는 그녀였지만 자신이 왜 그러는지,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 진정으로 몰라 그렇게 살아온 것 같기도 하다. 어린 시절, 계모에게 받은 구박과 지독한 가난 속, 장녀로서의 책임감이 독하고 강인한 인간형으로, 실수를 하지 않은 무결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내야만 하는 사람으로 그녀를 길렀을 것이다. 모진 인생을 살아온 그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못된 그녀. 부디 삶의 마지막 뒤안길에서 조금은 사랑받을 수 있길 바란다. 그게 동정이든 연민이든 상관없다. 주변의 따뜻한 마음을 안은채 삶을 마감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행복한 죽음일 테니 말이다.


“할머니. 저에게 잊지 못할 추억(?)들을 한 보따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프지 마세요.”

사랑한단 말은 아직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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