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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넘치는 곳

마지막 여행지 티볼리

by 한양희

느지막이 일어나 생각했다. 여행도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앞으로 3일의 휴가가 더 남았지만 나와 남편은 이쯤 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전날밤의 다툼도 피곤해서 생긴 것이 아니겠냐며 서로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하루를 앞당겨 미국에 복귀하기로 한 우리는 비행기를 탈 로마로 향하기 전 티볼리에 가보기로 했다. 티볼리를 목적지로 정한 데는 큰 이유가 없었다. 그저 우리나라 자동차의 이름으로 까지 활용된다면 뭔가 명소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과, 오르비에또에서 로마로 가는 길에 들를 수 있기 때문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다.



너무 아름다웠던 오르비에또 대성당을 한 번 더 보고 가자는데 동의한 봉이와 다시 한번 두오모 광장을 찾았다. 성당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많은 이들이 그 앞을 찾아 경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눈에 꼭꼭 눌러 담아가려 성당의 첨 탑 끝부분부터 올라가는 계단까지 천천히 꼼꼼히 쳐다보았다. 좋은 곳에 가거나, 맛있는 걸 먹을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나는 게 인지상정. 나는 나의 엄빠와 동생들을, 봉이는 자신의 엄마와 동생들을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우리 함께 이곳에 와 있는 것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져 서로 손을 꼭 잡았다.


티볼리로 향하는 길. 가장 싼 차를 빌리려는 노력 끝에 타게 된 빨간 Fiat는 수동이었기에 나는 운전할 수 없었다. 봉이는 계속해서 운전대를 잡았지만 요리조리 운전하는 것이 재미있다며 고맙게도 피곤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 덕에 나는 티볼리에 가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수석에서 열심히 찾아볼 수 있었다. 티볼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에스테 빌라였다. 화려한 정원과 분수로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별장으로 불리는 곳이라는 Chat GPT의 설명덕에 티볼리의 정수는 ‘물‘이구나 생각할 때 즈음, 도시 입구의 이정표와 함께 장엄하게 떨어지는 폭포를 마주하게 되었다.

저 어마어마한 물들이 어디서 오는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떨어지는 물을 향해 차를 몰고 도시 내부로 향했다. 이전 글에서도 설명했지만 이탈리아 구도심 내에는 ZTL(Zone Traffic Limitation) 자동차 진입 금지 구역이 있어 특정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 지난 며칠간 투스카니 지역에 익숙해진 우리는 능숙하게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도시를 향해 걸어갔다. 투스카니와 비슷한 또 다른 성이 보일 거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달랐다. 티볼리는 그 규모와 건축양식이 투스카니와 극명하게 차이를 보였다. 투스카니의 도시들은 중세 도시국가들로 서로 경쟁하며 성장했기에 높은 성벽과 요새화된 구조가 특징이었지만 티볼리는 대표적인 휴양도시였기에 도시가 생겨난 그 성격부터 너무 달랐던 것이다. 아넨에 강에서 흐르는 풍부한 수자원이 르네상스 양식과 만나 티볼리는 쾌락과 풍요의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우리는 고지대인 도시 중심으로 걸어 걸어 에스테 빌라에 도착했다. 크게 감흥이 없었던 저택의 내부를 둘러보고 정원으로 나왔을 때, 왜 이곳이 물의 도시로 불리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빌라 아래로 펼쳐진 드넓은 정원에는 엄청난 분수와 물길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방문객에게 풍요를 보여주기 위해 산책로에 설치된 100 분수부터, 티볼리의 예언자인 시빌라를 기념하는 시빌라 분수, 오르간이 연주되는 분수와 넵툰 분수, 지금은 물길이 끊겼는지 흐르지 않지만 계단 옆을 따라 마련된 수로까지.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물들이 펌프등의 인공적인 장착 없이 중력만으로 작동하는 분수시스템이었다는 것이다. 수로와 터널을 통해 공원 곳곳에 흘러넘치는 물길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인간들이 자연을 정복하면서도 조화롭게 꾸밀 수 있다는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르네상스의 미학과 기술이 집약된 에스테 저택은 물이 빚어낸 예술품이었다.



에스테 빌라 정원의 물빛 환상에 젖어 한참을 감탄하다 겨우 주차장으로 돌아서는 길에, 미용실을 발견했다. 봉이가 긴 머리가 거슬린다며 계속 투덜거리던 차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머리를 자르면 족히 80불은 들었기에 그것보단 싸겠지 하는 마음에 들어선 곳에 나폴리 출신의 ‘로자나’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나폴리에선 먹고 살길이 없다며 이곳 미용실에서 일하는 이유를 말하던 그녀의 가위 아래 봉이의 머리카락이 서걱서걱 잘려나갔다. 잘 잘랐는지 못 잘랐는지 분간이 가지 않은 상태로, 봉이의 머리칼은 바닥에 조금 쌓여있었고, 로자나는 이제 끝났다며 이발 가운을 벗겼다. 크게 달라진 바를 느끼진 못했지만 25유로니깐 괜찮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3만 원이 넘는 돈이었는데. 물가가 비싼 곳에 살다 보니 돈에 대한 감각이 둔해졌는지 나는 더 이상 합리적인 소비자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오묘한 기분으로 빨간 피앗을 타고 로마로 향했다.


머리 자르고 가벼운 봉이 발걸음


삶은 언제든, 어디서든 비슷하게 흐르는 것 같다. 누군가는 일자리를 찾아 집을 떠나고, 누군가는 사랑을 찾아 고향을 떠난다. 삶의 의미를 찾아 여행을 떠나고 휴식을 위해 휴양지로 떠난다. 각자에게 더 큰 가치를 주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로자나는 아이들을 더 좋은 곳에서 키우며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았고, 나는 봉이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해 미국으로 떠났다. 여름이 되어 여행을 떠난 나처럼, 고대의 누군가도 휴양지로 티볼리를 골라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빌라를 건설했다. 이동하고 살아내는 삶들. 넘치는 부를 과시하는 삶들. 의미를 찾아내려는 삶들. 그런 삶들이 인류가 태어난 시간과 공간 전역에 펼쳐져 있다는 것이 실로 놀랍다. 정착하는 삶에 익숙한 나에게 여행은 여러 삶을 엿볼 수 있는 창구면서도, 하나로 이어지는 역사와 삶의 궤적을 따라갈 수 있는 몸으로 읽는 책이다. 물이 흐르는 티볼리에서 새삼스레 예민해진 감각으로 흘러가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삶은 그렇게 흘렀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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