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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Goodbye Rome

한창 한식 좋아할 나이

by 한양희

로마의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대도시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찾아 급하게 밖으로 나섰다.

바로 한국 음식!

글로벌한 세상에서 전 세계의 대도시는 전 세계의 음식을 품고 있다. 이탈리아에 도착 한 이후 맛있는 음식들을 원 없이 먹었지만, 여행이 끝나갈 무렵 간절하게 원하게 되는 것은 바로 내게 익숙한 음식, 고향의 음식이었다.

음식이 주는 힘은 실로 놀랍다. 같은 원재료를 가지고도 어떻게 조리하는지, 어떤 부재료를 넣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요리가 된다. 음식의 조리 방법은 각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담고 있고, 집집마다, 요리를 하는 사람마다 다른 맛을 담는다. 익숙한 듯 또 다른 내 나라의 음식에서 나는 편안함과 힘을 얻는다. 예전에는 외국에 와서도 한국음식만 찾는 아빠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었지만 이젠 어느 정도 그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이가 들었나 보다.



저녁엔 클래식 공연도 예약해 둔터라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고형이 알려준 한식당으로 향했다. 때마침 딱 한자리가 남아있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김치찌개와 보쌈, 냉면을 시켰다.

“지금 주문이 좀 밀려있어서, 음식이 좀 늦게 나올 수 있습니다. “

“아, 저희 8시 30분 일정이 있어서 가야 하는데, 그때까진 되겠죠?”

”아, 물론이죠. “

멋진 옷맵시의 사장님이 친절하게 말씀하셨다.

음식을 남기는걸 극도로 꺼려하는 주부의 DNA가 발동해 너무 많이 시킨 거 아니냐며 봉이를 톡 쏘아보았지만 그건 불필요한 걱정이었을 뿐. 우리는 마지막 남은 고기 한 점까지 쌈을 싸 야무지게 먹었다.


계산을 하고 나서려는 때에 사장님이 물어봤다.

“여기 분들이죠?”

”네? “

“로마에 사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요, 저희 여행 왔어요. “

클래식 공연에 참석하기 위해 말끔한 옷을 입고 있어서 그랬는지 사장님은 우리에게 ‘로마 주민’이 아니냐며 물어보셨다. 여행객이지만 제대로 현지화되었다는 칭찬인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사장님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이쪽 골목을 돌아서 5분 정도만 가면, 로마에서 가장 오래되고 맛있는 젤라또 집이 있어요. 거기서 젤라또를 꼭 먹어봐요!”

이미 많은 음식을 흡입한 터라 젤라또를 먹을 수 있겠냐고 봉이에게 말했지만 내 발은 어느새 그를 따라 젤라또 가게를 향하고 있었다.

“맞아! 디저트 배는 따로라고.”



도착 한 곳은 어마어마하게 넓은 크기의 젤라또 가게였다. 나는 분명 인도 사람으로 보이는 여자 뒤에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인도인인 것으로 보이는 점원이 그녀를 응대했다.

‘망고랑, 피스타치오 주세요. 피스타치오를 먼저 넣고 그 위에 망고를 올려줘요.’

인도 억양이 잔뜩 담긴 그 여자가 자신의 요구사항을 구체적으로 말했다.

싱긋 웃던 점원이 하얀색 아이스크림을 퍼담으려는 순간, 내 앞의 여자는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피스타치오를 올려야죠! 피스타치오라고요! “

그가 푸던 아이스크림은 분명 피스타치오였는데, 이 여자가 왜 이럴까?

“이건 피스타치오예요. 피스타치오를 담으라면서요. “

이 가게는 별도의 색소를 사용하지 않아, 피스타치오 젤라또도 하얀색이었는다. 평소 먹는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이 초록색이어서 그런 걸까? 그녀는 일 잘하고 있는 사람에게 큰 소리를 친 것이다. 충분히 기분 나쁠 만도 한 태도였는데, 점원은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며 어깨와 눈썹을 으쓱해 보이던 그는 그녀에게 ‘좋은 저녁 보내요.’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 여자는 머쓱하게 웃으며 빠른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저는 쌀맛이랑, 초콜릿이요. 컵에다 주세요. “

“생크림도 올려줄까요?”

“물론이죠!”

내가 한국인이란 걸 단번에 알아본 그는 한국말로 ”정말 예뻐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더하며 립서비스를 했다. 그 말을 곧이 믿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유쾌하게 일하는 사람이 내 아이스크림을 푸고 있으니 아이스크림이 더더더 맛있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만나는 사람의 기분과 아이스크림의 맛까지 바꿔버리는 마법사 같은 그 사람은 그 가게의 보석 같은 존재였다. 별거 아닌 일일 수 있지만 즐기며 진심을 다해 하는 모습은 그 사람을 귀하게 만든다는 걸 느끼며, 일에도, 그를 보며 사람에게도 진심을 다해야겠단 다짐을 했다.



입에서도 컵 속에서도 살살 녹아가는 젤라또를 들고 힘차게 공연장으로 걸었다. 테르미니 역에서 도보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성 바울 성당은 1973년 건립된 로마 최초의 개신교 교회였다. 화려한 내부 장식이 오페라 아리아 콘서트를 더 빛내 줄 것 같았다. 가장 싼 표를 예약한 터라, 가장 뒷자리에 앉은 나는 성당 안 가득 울려 퍼지는 오페라의 아리아들을 들었다. 비록 관광객들을 위한 인스턴트적 공연이었지만 재야에서 공연하는 가수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펼쳐 낼 수 있는 장소라는 점, 여행지에서도 문화 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로마의 예술가들이 생계의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기반이 여러 곳에 자리하고 있고, 이런 노력들이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뛰어난 예술가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중 E lucevan le stelle(별은 빛나건만)이 울려 퍼지는 성당 내부는 엄숙하고 비극적인 분위기가 가득 찼다. 통통한 테너가 베르디의 리골레토 “La donna e mobile”를 부를 때는 경쾌한 멜로디가 고개를 까딱까딱하게 만들었다. 음악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만끽했다.



도시 외곽에 잡은 숙소에 돌아가기 전, 트레비 분수를 들렀고, 붐비는 관광객들 속에서 로마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이탈리아를 떠나는 날에도 다시 시내로 들어가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스페인 계단과 주요 관광지를 마음껏 누볐다. 로마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위해 나보나 광장에 있는 작은 이탈리아 파스타 집에 들어가, 먹은 오징어 튀김은 지금까지 먹은 오징어 튀김 중 최고였다. 잊지 못할 식사를 끝으로 나는 공항으로 돌아왔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당분간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로마였지만 집에서 여행을 더듬으며 글을 쓰니 또 가고 싶은 건 왜일까? 다음엔 엄마, 아빠를 꼭 데려가고 싶다. 더 나이가 들어 오래 걷는 게 힘들게 되면 골목골목 숨어있는 로마의 예쁨을 느낄 수 없을 테니까.


이탈리아를 떠나온 지 어느덧 한 달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분수대의 물소리와 뜨거웠던 여름의 햇살이 눈을 감으면 생생히 되살아난다. 여행은 끝나도 그 기억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앞으로의 일상을 단단하게 지탱해 줄 것이다. 바쁜 나날들이 펼쳐져도 마음 한편에 다음 여행지를 품고 살아갈 생각을 하면 왠지 하루가 조금은 가벼워진다. 언젠가 새로운 길 위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되기를 바라며 휴가에서 돌아온 삶을 오늘도 이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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