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잡을 수 있는게 아니니까
더위가 막 기승을 부리며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던 어느 여름날. 나는 장장 5개월간 지속해온 자격증과의 사투를 결판 짓기 위하여 한 고등학교의 교실에 앉아있다. 떠드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한 고사장. 긴장감에 미친 듯 뛰고 있는 내 심장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적막한 공간. 들리는 말이라고는 감독관이 알려주는 시험 주의사항과 안내사항 뿐이다. 시험지의 주의사항을 하나하나 눈에 새긴다. 실수를 해선 안된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준비해왔으니까. 감독관의 안내가 다 끝났다. 이제 그간 준비해온 모든 것을 쏟아낼 시간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 그려야할 시험 문제를 바라봤다. 그 순간 얼굴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온 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짜릿한 감정이 느껴진다. 환희와 기쁨. 기회는 언제나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했던가.
그간 자격증을 준비해온 시간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곤 준비하기 전에는 상상도 못 했다. 무언가를 준비할 때 한 번에 성공할 생각을 하지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으니까. 막연하게 한 번에 취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나의 착각이자 오만이었다. 대학교에서 4년간 전공 공부를 했던 사람들도 힘들어하는 자격증을, 비전공자인 나는 너무 쉽게 생각했다. 비전공자가 이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선 전공자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더 큰 노력이 필요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4년간의 세월을 압축해서 담아내야 하는 작업이니까.
그런데 그 당연하다고 생각한 걸 해내지 못했다. 남는 게 시간이었고 머리로는 공부해야 한다 것을 알고 있었지만, 비가 내리는 날에는 향긋한 비 내음에 코가 촉촉해지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가 쫑긋하며 맑은 날에는 하늘에 그려진 구름 그림에 눈이 즐거우니 언제나 마음이 허공에 붕 떠 있었다. 공부하기 싫다는 핑계는 어찌나 많은지 셀 수 없을 지경이다. 그 덕분에 쓰라린 실패를 경험했다. 이른 아침에 시작하여 두시간 동안 진행된 시험을 끝마치고 가답안을 기다리던 시간이 얼마나 떨리고 초조하던지. 연애편지를 전하고 방과 후 건물 뒤에서 좋아하는 소년을 기다리는 소녀 같은 기분이다.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나의 답안과 가답안을 비교해나갔다. 시험지에 거센 소나기가 연속으로 몰아칠 때는 가슴이 철렁하여 바닥에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꽤 선방을 했다. 지금까지는 아슬아슬하지만 문제가 없다. 이와 같은 추세라면 필기시험에 합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기대를 하고 마지막 과목의 채점에 돌입했다. 한 문제. 딱 한 문제가 부족하더라. 몇 번을 다시 봤는지 모르겠다. 혹시 잘못 채점한 것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 문제 차이로 떨어진다고? 정확하게 합격선을 통과하는 점수를 우스갯소리로 '신의 점수'라고 하는데, 나는 딱 한 문제 차이로 신이 되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진한 아쉬움이 전신을 지배한다. '조금만 더 공부해서 실수를 줄일 수 있었다면' 따위의 의미 없는 가정이 오랜 시간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미 지나간 버스는 돌아오지 않으니까.
혹여 가답안이 수정되지는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감도 확정 답안이 발표된 날 거품이 꺼지듯 픽하며 사그라들었다. 나는 내가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고 앞서 겪었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다시 한번 겪어야 했다. 한 문제 차이로 같은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는 사실은 나의 정신에 큰 타격을 주었으니까. 꽤 오랜 시간을 방황했다. 덕택에 두 번째 필기시험도 조금 불안했지만, 운이 좋았던 건지 실력이 상승한 건지 '신의 점수'로 통과했다. 한숨 돌리긴 했지만 이제 막 첫 번째 고지를 점령한 것뿐이라 마냥 좋아하긴 일렀다. 앞으로 점령해야 할 고지가 두 개나 더 남았으니까. 한 달 반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두 개의 고지를 넘기 위해선 앞서 첫 번째 고지를 넘을 때 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실패는 사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이전의 실패를 기억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절치부심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수입이 없는 백수에게는 손이 떨릴 정도로 비싼 가격이었지만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 인터넷 강의도 신청하고 학원도 다니기 시작했다. 애매한 공부로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확실히 비싼 강의들은 그 정도의 값어치를 한다. 혼자 공부했다면 단기간에 이 정도의 개념을 쌓지 못했을 거다. 개념이 착실하게 쌓이다 보니 독학할 때 몰랐던 공부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내가 이전까지 모르던 분야에 대해서 배운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으며 성장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착실하게 계단을 밟아가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기분이었다. 이대로라면 금방이라도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알찼다. 마치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붕 뜬 나의 기분을 한순간에 가라앉힌 건 1회차 시험의 합격률 소식이었다. 필기시험 이후 치르는 필답형과 작업형의 시험이 너무 쉽게 나와서 합격률이 53%에 달한다고 하더라. 충격이었다. 작년 시험의 합격률이 약 36%이고, 재작년 시험은 45%다. 합격률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 분명 앞으로 남은 2회차 시험과 4회차 시험의 난이도를 대폭 상승해 합격률을 조정할 것이 분명했다. 눈앞이 깜깜했다. 제대로 준비하여 1회차 필기시험에 붙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는다는데, 준비되지 않았던 나에겐 기회를 잡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바닥 없는 늪에 빠져 서서히 가라앉는 사람의 기분이 이럴까. 이번 시험에도 떨어진다면 그간 해왔던 노력은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한채 허무한 허우적거림에 그치게 될 터였다.
이런 불안감으로 인해서 나의 기분은 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이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공부하고 문제를 풀어내며 발전한다는 느낌이 들 때는 아무리 시험이 어렵더라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차오르지만, 다음날 전혀 새로운 유형의 문제에 직면하여 능력의 한계에 부딪히면 또다시 늪에 빠진 것 같은 절망감에 삼켜졌다. 이번에도 자격증을 따지 못한다면 5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허공에 날린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 뻔했다. 짧지 않은 시간을 투자한 만큼 손에 자격증이라도 쥐어져야 성취감이라도 있을 텐데, 그 작은 성취감마저 위협받게 생겼으니 정신적인 압박감이 상당했다.
필답형 시험 전날에는 불안감에 잠도 오지 않았다. 다음날 세시간 밖에 자지 못해 최악의 컨디션인 나에게 필답형 시험은 역대급 고난도의 문제를 선사했다. 어렵다고 느낀 건 나만이 아니었나 보다. 쓱싹쓱싹 거리는 필기구와 시험지의 마찰 소리를 뚫고 여기저기서 수험자들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필답형에선 목표하던 점수에 도달하지 못한다. 푼 문제에서 실수를 전혀 하지 않았다더라도 점수가 부족하다. 이 자격증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선 남은 작업형 시험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와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만 울리는 조용한 교실에 앉아 도면을 그리고 있다. 이 도면을 그리기까지의 지난 일주일간 불안감에 몸서리치면서도 할 수 있는 많은 것을 했다. 물리적인 시간이 너무 부족했지만 핑계 댈 시간조차 없었다. 매일 도면을 그리고 검도를 받아 지적받은 부분을 고치고 부족한 부분을 보강해나갔다. 아침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도면을 그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눈은 뽑힐 것만 같고 장시간 구부려진 등과 움츠러든 어깨에선 단말마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도 손과 눈을 멈출 수 없었다. 남은 건 작업형 시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으니까.
그런 인고의 시간을 거치고 시험장에서 도면을 받아본 뒤 나는 속으로 환희의 소리를 질렀다. 크게 소리를 지를 수 있었다면 전방으로 큰 함성을 3초간 지르지 않았을까. 아마 이날 시험을 쳤던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쉬운 시험지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으니까. 실수했던 부분을 복기하고 기존에 연습했던 대로만 하면 도면의 완성 이후 검도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험 후 반응을 살펴보니 역시나 역대급으로 쉬운 문제가 출제되었다고 한다. 기본 중의 기본만 나왔다나? 물론 작업형 시험이 쉬웠다고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필답형 시험이 어려웠고 작업형이 쉬웠던 만큼 조그만 실수도 크게 감점될 수도 있으니까.
혹여 자격증을 취득한다고 하여도 '운 좋게 쉬운 문제가 나와서 붙은 거 아니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맞다. 작업형의 문제마저 어렵게 나왔다면 아마 꿈도 희망도 없이 절망감에 빠져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을 거다. 운이 좋았다. 작업형 시험을 치르는 5일 중 운 좋게 내가 고른 날에 가장 쉬운 문제가 나왔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 작업형 시험을 치르면서 눈앞에서 확인한 사실이 하나 있다. 운도 준비된 자가 잡는다고.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기회를 잡아야 할 타이밍조차 인식하지 못한다고.
이렇게 쉬운 문제가 나온 날에도 중간에 포기한 사람, 도면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비난하거나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각자의 사정이 있었을 테니까. 자격증 시험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시간 투자를 못 했을 수도 있고, 그냥 1회차 필기시험 때의 나처럼 바람의 연주곡과 비의 내음이 좋아서 공부에 소홀했을 수도 있다. 다만 지금 준비가 부족해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은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을까.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온다는 보장이 전혀 없으니까. 운이라는 건 내가 잡고 싶을 때 잡을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니까.
지난 5개월간 내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아마도 자격증도 지식도 아닌 '기회는 언제나 준비된 자에게 온다'라는 사실일 것 같다. 짧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며 준비되지 않은 사람으로서 기회를 날려보기도 했고, 준비된 사람으로서 다가온 운을 낚아 채보기도 했으니까. 직접 몸으로 부딪쳐 힘들게 깨달은 사실이니만큼 쉬이 잊히는 법 없이 앞으로 나아갈 나의 인생에 큰 이정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