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함께 걷는 세상 17
상하이라는 행정구역은 그 크기로 보자면 6340 km²로 605.21km²인 서울보다 10배는 더 크다. 하지만 대부분의 행정기관과 관광지가 몰려 있는 시내는 그리 넓지가 않았다.
근대 초기 상하이를 구성하던 지역은 현재의 구도시라고 하는 조계 지역이었고 한때 이 좁은 조계 지역에는 150만 명이나 되는 인구가 밀집하여 1900년도 초기에는 극동의 최대 인구 밀집지역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었기 때문이었다.
1843년 영국이 아편전쟁을 끝내고 처음으로 상하이에 조계 지역을 만든 후 지금까지 상하이의 역사는 작은 항구 도시라기보다는 어느 한 국가가 겪었을 법한 그런 굴곡지고 다양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영국을 필두로, 미국, 프랑스 등이 항구도시인 상하이로 하나씩 들어오며 너도 나도 자기네 구역이라고 선을 그어 옹기종기 모여 살았는데, 그 외국인들이 그렇게 상하이 땅을 빌려서 살았던 곳을 조계 지역이라 불렀다.
애초에 청나라 말기 정부는 초기 상하이의 중심지역인 남시(南市) 구역을 제외한 변두리의 황무지에 조계 지역을 내어 주고 중국인(華)과 서양인(洋)을 따로 주거하게 하는 화양 별거(華洋別居)의 정책을 펼쳤다. 아무것도 없는 빈 땅에서 뭘 할 수 있을까 라는 청나라 정부의 생각과는 달리, 줄줄이 들어온 서양 국가는 그곳에 자기만의 사법제도로 도시를 만들어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해 갔는데, 결국에는 한 도시 속에 전혀 다른 형태의 구조와 모습을 가진 두개의 국가같은 도시가 자리 잡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종국에는 중심지역이었던 남시(南市)보다 조계 지역이 더 발달하게 되고, 중국인을 비롯한 더욱 많은 서양인이 몰려와, 결국 화양 별거가 아닌 화양 동거(華洋同居), 또는 화양 잡거(華洋雜居)라는 특이한 형태의 도시 구조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상하이의 역사는 한 도시 안에 각기 다른 국가의 구조물과 사람들이 혼재하게 되어, 사상적 교류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며 다양한 문화를 포용할 수 있는 지금의 국제적인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이 거주하던 곳은 상하이 구도시에 있는 프랑스 조계지였던 장소로 상하이 구도시의 중심지였다.
북쪽으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는 영국과 미국이 공동 조계를 구성했던 찡안쓰(靜安寺:정안사)가 있었고, 동쪽으로 20여분 정도 걸어가면 공산당 창당 대회를 했던 신천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상하이로 오고 나서 틈만 나면 집 주위를 함께 돌아다녔다.
내가 굳이 아이들에게 상하이의 이런 역사를 알려 주지 않더라도, 자전거를 타고 플라타너스 낙엽이 가득한 길을 휘저어 가거나, 한적한 저녁 산책길을 걸어가게 되면, 그런 화양 별거에서 화양 동거로 넘어간 상하이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주변에서 몇 년을 살았던 지인이 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 유럽은 어떻더냐는 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했었다.
"그냥, 조금 더 큰 우리 동네던데요. 게다가 유럽의 관광지에는 외국인보다 중국인들이 더 많아서, 어떻게 보면 여기 프랑스 조계지에 외국인이 더 많은 거 같더라고요. 다른 점이라면, 간판들이 모두 영어라는 거? 별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어요."
우리 집에서 걸어서 2분이면 우캉맨션(武康大樓:무강대루)이라는 르네상스 풍격으로 만들어진 배 모양의 커다란 건물이 있고 그 바로 아래에 진한 녹색 페인트를 칠한 나무 문의 스타벅스가 있다. 나는 이곳이 처음 생길 때부터 찾아오는 곳이라 아이들과 함께 자주 이곳에 와서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으며 시간을 때웠는데, 이 주변 지역이 각국의 대사관이나 영사관, 문화원이 모여 있는 곳이라 찾아오는 손님들도 그쪽에서 일을 하는 외국인이 많았다.
어차피 나도 그네들도 다 외국인이다 보니, 우리는 스타벅스에서 만난 인연으로 서로 이야기도 하고, 문밖에 서서 담배도 나눠 피우곤 했었는데, 그런 모습이 아이들에게는 외국인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바꾸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여기저기 카페를 돌아다니다 항상 마주치게 되던 올린이라는 영국인은 영국에서 샤넬(구찌인지 잘 모르겠다.)의 패션모델이었는데, 자주 얼굴을 보다보니 친구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내가 중국어를 조금 가르쳐 주게 되었다. 그는 그 보답으로 아이들에게 영어 과외를 해 주었다.
말이 영어 과외이지, 내가 옆에서 아이들과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냥 잡담 수준이었다. 영국 여왕을 영국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이애나 비는 영국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었는지, 모든 영국 사람들이 정통 영국식 발음을 사용하지는 않으며, 영국 발음에도 황실에서 사용하는 퀸즈 잉글리시가 따로 있다는 등, 그야말로 친구들과 잡담하듯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다 였다.
물론 내가 그에게 중국어를 가르칠 때도 같은 방법이기는 했다. 오늘 날이 추운데 유니클로에가서 옷이나 사라는 둥, 곧 대 세일을 하니 그때 가서 사면 싸다는 둥, 지하철을 타고 가면 금방 갈 수 있고, 택시 타면 기본요금이라는 등의 이야기로 중국어 수업을 했었는데, 그 역시 그 나름대로 아이들에게 영어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도 한동안 국제학교에서 교육관련 일을 한 경험이 있어 나름의 교육관이 있었던 것이었다.
한 번은 스타벅스에서 그렇게 잡담 같은 영어 수업을 마친 큰 아들 벼리가 어떤 사람의 전화번호를 들고 와서는 나에게 연락해보라고 했다. 올린과 영어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 흑인이 다가와 이야기를 걸었고, 이것저것 이야기하다 보니 나를 이곳 스타벅스에서 자주 보았고 한번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큰 아들 벼리가 준 연락처로 연락을 하기도 전에 스타벅스에서 그와 우연하게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근처에 있는 미국 영사관의 전산팀에서 일하고 있는 아이작 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나이도 나와 비슷해서 아침마다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이들과도 한 번씩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길거리 어디서나 외국인들과 마주치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해했지만, 아이들 스스로가 이곳 상하이에서 외국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한동안 어색해했었다.
무수히 많은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그저 한명의 한국인으로 평범한 구성원이었던 존재가 1시간 30분이라는 비행기를 타고 오면 순식간에 외국인이라는 신분으로 바뀌어 버린다.
내가 서 있는 환경이 바뀌면서 나의 신분과 존재의 의미도 바뀌게 되는 것에 아이들은 적잖은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국제도시 상하이 전체를 국제학교 삼아 교육을 받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국제학교의 잘 짜인 교육제도와 커리큘럼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그런대로 괜찮은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 국제학교를 보내지 않기를 잘했다는 애써 자조 섞인 웃음을 지어 본다. 그것은 이곳 국제도시 상하이에 스며들다보면 국제학교에서 얻을 수 있는 적지 않은 것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영국, 미국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고, 새해를 맞이 하다 보면, 그 속에는 영어와 중국어, 한국어가 혼재하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이 되고, 그 문화를 전혀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다양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문학적 소양이 쌓이게 되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혁신적인 사고력을 가지게 된다.
나와 다른 문화와 사람을 포용하고 이해한다는 것.
내가 속해 있는 국가와 민족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다른 국가와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느끼는 것이 인문학을 배우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과 배경이 되는 것이 아닐까.
유럽인들이 아시안에게 느끼는 신비감이 있듯이, 우리 아시안에게는 유럽인들에게 느끼는 신선함이 있고, 그들 모두가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젠틀하고 영웅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고,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질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느낄 때가 되어서야, 그들을 편견 없이 편안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난민 문제로 한국이 떠들썩할 때나, 이슬람 국가의 할랄 음식에 대한 비평이 이어질 때도 아이들은 그들의 다양성을 이해하며 언론과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그 상황을 이해하려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 상하이에 와 있는 아이들 스스로가 어찌 보면 화양 별거에 해당되는 이방인이고, 그 이방인이 이제는 화양 동거하게 되는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