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한 남편과 같이 둘째 목욕을 시키고 나와 로션을 발라주고 옷을 입혀주고 있었다. 퇴근하고 오면 웬만해서는 밖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인데 갑자기 외출복을 주섬주섬 다시 꺼내 입더니 뜬금없이 오렌지 주스를 사온다고 한다.
남편은 몇 주 전 받은 건강검진에서 위 내시경을 했는데 조직검사에서 헬리코박터균이 발견되어 제균치료를 하고 있는 중이다.
나도 작년에 헬리코박터균이 나와 1차로 제균치료를 2주간 했고, 한 달 뒤 검사에서 균이 완벽하게 제거가 안되어 2차 치료까지 진행을 했었다. 2차때는 약이 너무 독해서 힘들어 하던 차에 체하기까지 해서 결국은 5일 정도 먹다가 중간에 그만두긴 했지만 거의 2달은 제균치료에 신경 쓴 이력이 있다.
제균치료 부작용으로 미식거림이나 복통 등의 증상이 있는데 남편에게는 복통이 찾아왔다.
'아~ 배야~'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통증이 꽤 컸던 모양이다. 2~3일 통증에 시달리더니 1차에 제균치료를 꼭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오렌지주스가 흡수율을 높인다며 귀찮음을 무릎쓰고 나가서 사온다는 것이었다.
제균치료 약을 먹기 시작하더니 밥을 꼬박꼬박 챙겨먹고 일주일에 1~2번은 꼭 저녁약속이 있던 사람이 술을 먹을 수 없으니 일찍일찍 들어와 밥 먹을 채비를 한다.
퇴근하고 와서 밥 차려 달라는 게 아니라 같이 저녁을 준비하고 본인 몸도 알아서 챙기려고 하니 좋은 모습인데 그렇게 열심히 본인을 챙기는 남편의 모습에 왜 난 '유난'이라는 단어와 '서운함' 이라는 감정이 생겨난 걸까?
내 감정은 속마음을 넘어 바깥으로 점프해버렸다.
"나 제균치료할 때는 약 먹나보다 하면서 별 관심도 없더니 오빠가 제균치료하게 되니까 중병걸린 것처럼 열심히 챙기네..."
"내가 무슨 중병 걸린것처럼 했다는거야?
"아니, 내 말은 내가 제균치료 약 먹을 때는 먹는지 안 먹는지 별 관심없더니 오빠가 먹게 되니까 열심히 챙기는 게 내 입장에서 약간 서운해서 하는 말이지. 나 이번에 코로나 걸렸을 때도 괜찮은지 별로 신경쓰지도 않는 거 같고 하니까 그것도 그렇고."
"중병 걸린것처럼 유난 떤다고 말하는 거잖아!"
"하... 아니다. 그만하자"
딱 여기까지만 얘기했는데 "중병"에 꽂힌 남편의 얼굴색이 달라지며 나에게 쏘아 붙인다.
내 입장 얘기한다고 말이 길어지면 싸움이 될 걸 잘 알기에 난 그냥 입을 닫았다. 언젠가부터 매번 우리 부부의 대화 패턴은 이런식이 되어갔다.
난 간단한 공감의 말을 바라며 남편에게 얘기를 꺼내면 남편은 항상 '내가 그런건 이런 저런 이유 때문이지.. 라거나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너도 그런 적 있잖아 ' 라는 식의 변명으로, 아니면 너도 똑같다 라는 식의 대답으로 결국은 '난 잘못한 거 없어' 라고 끝내려는 거다.
내가 남편에게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그는 왜 잘못하지 않았다고 변명부터 하려는 걸까...
묵언수행하는 거 마냥 저녁 내내 입을 닫고 조용히 집 안을 왔다갔다 하며 서운하고 복잡한 감정들과 헝크러진 머릿속 생각들을 곰곰히 되뇌여 보았다.
원인은 바로 "나"였다.
불과 2~3년전만 해도 남편은 아픈 둘째와 함께 외출도 못하고 갇혀 지내는 일상을 보내는 나에게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해주고 배려해줬었다. 그 시절 내 자존감은 바닥을 뚫고 우물을 파고 있었고 우물에 비치는 못나 보이는 내 모습을 매일 마주하고 있었다. 아이가 아픈 후 우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의 부모인 우리 둘 중에 나만 일상이 망가져 있고 남편은 그대로인 거 같았다. 여전히 회사를 가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상이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억울한 감정이 들었던 거 같다.
말이든 행동이든 집에서는 항상 다 '내 말이 맞는거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되는거야.' 라며 남편이 잘못했고 내가 맞다고 그렇게 남편을 이기려고 했다. 매번 그렇게 남편을 이기는 방식이 '난 혼자서도 잘하는 사람이지'라는 삐뚤어진 자신감으로 채워졌고 그게 마치 나의 자존감인거 마냥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잘못된 방법으로 튕겨나간 어두운 감정의 화살들은 남편을 향해 날아가서 그대로 차곡차곡 꽂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 14년차 부부인 우리, 아이들은 커가고 어느 순간 이제는 아이를 위한 동지애밖에 안 남은 거 같다는 생각에 가끔 씁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서로를 위한 노력은 안하면서 상대방이 먼저 변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만 가진 채.
다음 날이 되고 둘째 아이 외래가 있어 어색한 분위기에도 어쩔 수 없이 같이 채비를 해 병원으로 출발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차 안에서 핸드폰만 주시하는 나에게 남편이 잠깐 손을 달라고 한다.
무뚝뚝하게 '갑자기 왜?' 라며 버팅기니
"내일 오전에 '서울의 봄' 영화 볼래? 너 보고 싶어 했잖아"
"회사는? "
"보고 점심 같이 먹고 가면 되지. 너 기분 안 좋은 거 같아서.. 영화 보자고 하면 풀릴까봐, 어때?"
"흠, 알겠어. 근데 오빠,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왜 항상 나 이기려고 해? 그냥 좀 져주고 그러면 안돼? 남들한테는 한 없이 잘 베푸면서 왜 나한테만 그렇게 매정하게 이기려고 하냐고..왜 나한테만.. 엉엉~~ "
나 때문에 변해버린 남편이란 걸 아는데 또 이렇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니 아이러니하게도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와 눈물이 나온다. 항상 쎄게만 쏘아대던 와이프가 눈물을 보이니 고맙게도 남편도 같이 수위조절을 해준다.
"왜 울어..."
진도는 천천히 나가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P.S 기분좋게 앉아 영화상영 전 광고를 보고 있는데 남편이 회사에서 점심 같이 먹는 지인들한테 연락이 왔다. 오늘은 와이프랑 영화 보러 와서 점심 같이 못 먹는다고 톡을 날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