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부터 예술은 뜬구름을 잡아다 박제하는 일이었다. - 이숲오 <꿈꾸는 낭송 공작소> 중에서 -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일일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친해지게 됐을까?", "우리는 참 잘맞는 짝인 것 같아." 또는 "저 인간 좀 안보고 살 수는 없나.", "앞으로 절대 마주치지 말자."
뭔가 특별한 것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음이 틀림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상호 반응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 특별함이 반복되거나 강렬할수록 더 두드러지는 일들이 그에 이어서 일어나게 된다. 좋은 인연은 더 좋게 나쁜 인연은 덜 나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삶의 기술이자 예술이다.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일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일들은 배경으로 지나가고 있다. 별다른 의미도 별다른 가치도 없어 보이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목하기 전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일어나는 일들이 널려 있다.
대부분의 생각들은 모호한 채로 지나간다. 말에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있고, 그런 관심조차 못받는 말같지 않은 말들이 있다. 그런 모호한 생각과 말이 나중에서야 '맞아! 바로 그거였어'라며 특별해 지기도 한다.
일이 지향하는 공통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은 이런 모호한 일들에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일의 의미와 가치는 외부에서 주어지기 전에 자체적으로 지니고 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일어나는 일도 없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라져 버리는 일도 없다.
우주의 칠흙같은 어둠 속 아무것도 없어보이는 진공에서 일어나는 에너지들의 요동도, 시작된 이유가 있고 나름의 시도 속에서 결과를 남긴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찮아 보일지 몰라도, 주목할만한 특별한 일들도 그런 하찮은 일들이 만든 결과들이 쌓이면서 생겨난다.
하찮은 일은 없다. 우리에게 그렇게 느껴지는 일들이 있을 뿐이다.특별함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만들어왔고 다시 만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지금 그 자리에 다른 일이 아닌 바로 그 일이 도약을 시도하며 다시 일어나기 때문에 일은 더 특별해질 수 있다.
가까운 친구의 전화번호를 기억하는 것도 기계가 대신하는 요즘에 시를 외운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 무엇이든 검색하면 전문가 수준으로 알아내 정리할 수 있는 시대에 정답도 없는 시인의 의도를 읽어내려 하는 것은 또 얼마나 수고로우 일인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에서 보이지도 않는 무형의 마음을 음성으로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시 낭송이야말로 불가능하면서 퇴행적인 행위의 원형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노인은 그렇기에 더더욱 존재할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애초부터 예술은 뜬구름을 잡아다가 박제하는 일이었다… 노인은 시 낭송이야말로 저 하늘의 뜬구름을 바가지로 퍼다가 살아있는 듯 고정시키는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노인 앞에 던져진 시들은 뜬구름처럼 제 모습을 순간순간 바꾸며 흐르고 있었고, 낭송은 추상의 모양을 실감 나게 잡아가는 박제의 과정과 지독히도 흡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