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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뽀로리 Aug 04. 2022

내가 연구실에서 배운 건 지식이 아니라 태도였지

새싹 UX Researcher의 직업 일지!

새싹 UX Researcher의 직업 일기!






이쪽은 전공이시니까 잘 하시겠네요?


회사에서 유관부서를 만날 때 참 많이도 들은 말이다. 안 두드려보고 건넌 돌다리일 지라도 인지심리학을 전공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내가 먼저 말을 하기 전에 팀장님들이 소개를 해주기도 했다. ‘뽀로리님은 이쪽 전공이시라, 전공도 하셔서 같이 가이드를 주시면 되니까….’ 전문성을 인정하려는 참 고마운 말이긴 하나,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식은땀이 났다. 내가 이런 표현을 들을 만한 사람인가.


연구실에서 퍼스트 이어(※입학 만 1년을 지나고 나서 했던 첫 연구 결과 발표)를 마치고 나서, 참 많은 위로를 받았다. 첫 연구가 으레 그렇듯이 결과는 엉망진창이었다. 디펜스는 무슨. 디펜스가 아니라 죽음을 직감한 사람 같았다. 쏟아지는 질문에 제대로 답도 못했다. 시간 관계 상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말이 참 비참하면서도 좋았다. ‘연구 주제를 바꿔서 다시 설계해 볼 것.’ 그게 내 퍼스트 이어 성적표였다. 기라성 같은 연구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진 않았지만 이렇게 처참할 줄도 몰랐다. 참 속상했던 것 같다.


처참한 성적표. 기운이 잔뜩 빠진 나에게 선배는 이런 위로를 건넸다. “원래 석사생들은 새로운 발견은 못 해. 연구 주제에 맞는 방법론을 찾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지.” 그때 당시의 나는 어쨌든 연구 주제는 영 아니라는 거잖아요, 하고 심란한 낯을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저 말보다 중요한 말이 또 없었다. 연구 주제에 맞는 방법론을 찾을 것.


인지심리학은 심리학과 학도들의 비인기 분야를 베이스로 가져간다. 생물, 통계, 그리고 실험 설계. 나 역시도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숫자들의 향연에 피눈물을 흘렸다. 팔자에도 없는 코딩을 하고, 실험을 돌리고, R이니 SPSS니 통계 프로그램을 부여잡고 늘어지고. 대체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야! 하고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 동기들은 맞는 이야기라며 함께 눈물로 밤을 지새워주었다.


지금에서 되짚어보면, 여기에 또 키 포인트가 있었다. 왜 저런 일들을 그렇게나 많이 시키는 게 연구실의 커리큘럼이었을까?








모든건 Why를 찾는 연구자의 자세로


연구실 생활은 소위 ‘Why 빌런’과의 싸움과 같았다. 모든 논문 리뷰와 수업은 Why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입을 여는 게 민폐라고 여겨지는-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학부 수업과는 결이 달랐다. 논문을 정리 발표할 때는 질문이 온 사방에서 떨어졌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 그런 결론이 나왔는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그건 흡사 5살 어린이의 질문 폭탄과 같았다. 마냥 행복한 흥미도 한 두 학기 정도지, 3학기가 넘어가고 있을 시점엔 그저 속으로 눈물만 흘렸다. 그만 질문하세요! 그만!


실제 업무를 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괴롭혔던 무수한 선배들과 교수님들은 정말로 Why가 궁금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내 멘탈 모델이 궁금했던 것이 아닐까. 내가 어떤 자료를 근거로 이 이론에 동감했는지, 어떤 생각의 흐름을 따라서 이 연구자의 의견에 반박을 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사람처럼 보였다. 왜? 결국, 그들이 묻는 건 하나였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해라!’ 나의 생각을 논리적인 근거를 토대로 만들고, 근거가 없는 사실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 일종의 가설을 만드는 훈련을 시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억지로라도 질문을 던져서 스스로 레퍼런스를 찾게 만들었다. 그게 연구자의 마인드 셋임을 알려주었다. 우매한 나는 이 마음을 3학기가 지나가고 나서야 알았지만.


연구실을 졸업하고 난 뒤에 생긴 말버릇은 ‘찾아볼까요?’와 ‘왜 그런지 궁금하네요.’ 였다. 업무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2년이 넘는 시간 내내 Why 빌런과 싸운 결과였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런 행동을 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 이미 마음 속에서 판결을 내렸을 지라도 속단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직감을 의심해야 한다. 결론을 맺는 건 충분한 근거를 찾고 난 뒤에 해야 한다. 수용이 아니라 추론이 좋았다. ‘100명을 대상으로 결과를 받아봤는데, 80%가 이런 경향을 보이네요. 사용자들에게 중요한 건…’ 근거를 통해 말을 해야 마음이 놓인다. 스스로 설득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내 3년 연구실 생활의 진정한 성과다.








지나친 ‘학술적임’은 잠시 접어둘게요!

신입사원 때와 현재의 내 업무 방식


그런데 실무에서 누구에게도 반박당하지 않을 Why를 찾는 게 가능할까? 업무를 시작할 무렵에는 참 어려워 보이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전문적인 줄 알았다. 깊게 생각하는 자세가 연구자의 마인드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유관부서들이 그건 왜 그런가요? 라고 물으면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반갑게 꺼내며 말했다. ‘이론에 따르면 블라블라블라… 근거는 논문을 첨부할게요 블라블라…’ 그게 신입사원 때는 얼마나 자랑스럽던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이해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살필 겨를도 없었다. 연구실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회사에서는 아니라는 걸 좀 빨리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6개월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물론 지금은 이러지 않는다.


연구원의 마인드 셋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내 신분은 회사의 팀원이다. 이는 내가 완벽을 위해 핀셋으로 하나씩 탑을 쌓는 걸 기다려 줄 수는 없다는 의미다. 회사에서는 효율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내가 찾아낸 이 발견이 얼마나 공을 들여 만들어낸 Why인게 중요하지 않다. 이론 자체가 얼마나 권위적인지 중요한 것도 아니다. 내가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또한 중요 항목이 아니다. 중요한 건 논리의 흐름이다. 유관부서와 빠르게 소통하고,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정보만 빼서 전달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를 늘어놓는 게 내 전문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내 전문성은 찾아낸 인사이트를 깔끔하게 전달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용자들은 1분 1초가 아까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거예요.’ 이런 인사이트를 도출해냈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이 단순해 보이는 인사이트를 찾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를 읽고 생각을 했는지가 이 인사이트에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이건 나의 업무이기 때문에, 알아주는 이는 나와 팀원들이면 되었다. 유관부서는 다르다. 이 단순한 인사이트가 왜 이렇게 나오게 되었는지 흐름을 설명해야 한다. 설득은 내 말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 뒤로 나는 ‘무슨무슨 이론에 따르면~’ 같은 말은 접어두기로 했다. 쉽고 간결한 말로 내 결과물을 설명하는 것. 이게 나의 업무 방식이다.


물론 방심하면 한 우물 파던 버릇이 나오기도 한다. 내 논리가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숨기고 싶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말이 길어질 때마다, 스스로 정신 차리려고 노력을 한다. 지나친 학술적임은 회사에 어울리지 않는다! 라고 마인드 셋을 다시 잡는다.








Why 찾기에 시간은 늘 빠듯해


나의 업무 진행 과정


지나친 학술적임은 제외하고, 내가 일을 할 때 Why를 찾는데 시간을 많이 소비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전체 프로젝트 워킹데이를 5D라고 하면, 그 중 3D는 이유를 찾는데 사용하고 있다. UX Researcher의 덕목이란 그래도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에서는 꼭 학술적임과는 결별한 것처럼 말했지만, 왜를 찾을 때 전공 분야를 간간이 섞어서 써주기도 한다. 그저 주가 아니라 보조 자료가 되었을 뿐이다. 빠르고 가벼운 효율성과 깊고 무거운 연구 마인드 사이의 밸런스를 잡는 게 늘 따라다니는 고민거리다. 빠르면 좋지만, 내 업무의 본질을 놓치고 싶지 않다. 


다만, 회사는 무한정 나를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다른 업무에서 시간을 최대한 줄인다. 어떤 식으로 업무 시간을 줄였는지는 차차 글로 작성해보고자 한다. 지금은 그저 내가 연구실에서 배운 게 무엇인지 되새기는 행동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인지심리학 전공하셨으니까 많이 아시겠네요. 그런 질문이 들어오면, 오늘의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건 도구일 뿐입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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