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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든 Sep 22. 2020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해도 괜찮아요.

멀티태스킹이 디폴트가 아닌 사회를 바라며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항상 등장하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산만하다.


어릴 때는 산만하다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과 키가 별반 차이 없는 6학년 때를 제외하곤 기억이 잘 안 날 정도로 초등학생 시절을 조용히 보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요즘도 가만히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자신을 볼 때면 아 참, 나 산만하지 생각하곤 합니다. 역시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눈은 정확한가 봅니다.


가만히 있는 시간이 초조합니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면 이래도 되나 싶습니다. 예컨대 가만히 앉아서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늘 식사 준비를 하며 드라마를 틀어 놓습니다. 그 와중에도 각 음식이 준비되는 시간을 계산하여 재료를 준비하고 육수를 우립니다. 동시에 세탁기에 빨래를 불려 놓으며 며칠 동안 얼마만큼의 빨래를 해야 할지 따져봅니다. 비 예보가 있는지 날씨도 체크해야 합니다. 또한 식재료 재고가 머릿속에 업데이트됩니다. 언제 장을 봐야 하며 무엇을 사야 할지 잊지 않도록 메모해둡니다. 드라마 내용을 따라가는 것도 빼놓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 식사가 준비되면 어김없이 무언가를 시청하며 입을 우물거립니다. 의식적으로 꼭꼭 씹어먹으려고 노력하지만 온전히 그것에 집중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 멀티태스킹은 은근히 필수입니다. 센스 있다,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멀티태스킹에 강해야만 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내 동료, 내 상사에게 무엇이 필요할지 미리 청사진을 짜 놓고 업무를 하지 않으면 몸도 정신도 힘들어집니다. 멀티태스킹을 하지 않으면 한 번에 다 할 것 두 번 세 번에 나누어서 하게 되고 욕은 욕대로 먹을 수 있습니다. 어쩌다가 한 가지 일에 오랫동안 집중하고 나면, '미쳤나봐. 이걸 이렇게 오래 붙잡고 있었네. 뭐 놓친 것 없나?'하고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분명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심지어 멍도 좀 때리면 어떻습니까)


쉴 때도 하나의 오락거리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노트북이나 아이패드로 유튜브나 드라마를 틀어 놓고 핸드폰으로 SNS를 한다든지, 게임을 하면서 라디오를 듣거나 어김없이 드라마를 틀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고 있으면 시간을 알차게 쓴 것 같으면서도 왠지 몸은 더 찌뿌둥합니다. 심지어 낮잠을 자는 시간도 견디지 못합니다. 왜 낮잠을 자면서 드라마는 보지 못하는지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수면 욕구와 재미 욕구는 동시에 충족하는 것은 원하는 대로 꿈을 꾸지 않는 이상 거의 불가능합니다. 매일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한 가지 일만 하는 그 시간이 너무도 초조하고 불안한데,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초조함이 요즘에는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있지 않고 여유가 생길 때면 긴장할 때처럼 속이 울렁대기 시작하고 곧 심장 박동이 느껴집니다. 이런 증상은 1분에 2~3회 정도로 자주 발생하며 그 기분에 집중하면 불편감이 연속적으로 반복됩니다. 부정맥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여 큰 병으로 번질까도 두렵습니다.


이쯤 되니 그만 산만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나는 여유라는 것을 진정으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되도록 멀티태스킹을 안 하려고 합니다. 걸을 때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걷기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걷는다는 행위 하나에도 내 오감, 육감은 작동하고 있으니까요. 걷는 데 장애물을 마주치지 않도록 잘 보며 걸어야 하고 어딘가에 걸려 넘어지기 직전에는 순발력을 발휘하여 최대한 덜 창피하게 착지해야 합니다. 그것에만 집중하며 걷기만 해도 내 머릿속은 바쁩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 음식 명상이란 것도 있다던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먹는 것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합니다. 일할 때에도 다가오는 다른 것들에 너무 정신을 할애하지 말고 현재 하는 일에 더 집중하는 연습을 합니다. 물론 욕을 들어먹지 않을 만큼만요. 집안일을 할 때도 요리면 요리, 빨래면 빨래, 청소면 청소에 온전히 집중해봅니다. 산만러들의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침입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니면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 불현듯 궁금해지거나요.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부터 제대로 해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해도 괜찮다고 스스로 용인하는 것입니다. 급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도 말입니다. 울렁거림과 가슴 두근거림의 증상이 올 때마다 침착하는 법과 여유를 갖는 법을 연습합니다. 이런 것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맘처럼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잘 몰랐나 봅니다. 여러 사람 몫을 해내지 않아도 됩니다. 어떨 때는 그저 숨쉬기 하나만 해도 충분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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