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아우르는 가족 드라마
나이가 들어갈수록 엄마와 닮아가는 것을 느낀다. 무심코 하는 말투나 사소한 표정까지 문득 엄마 같다고 생각할 때가 많아졌다. 한창 사춘기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의 말이나 행동을 똑같이 하고 있을 때마다 나 자신이 낯설다. 세상에 불만이 많았던 중2 때의 나는 어느새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나를 꼰대라고 생각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젊은이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지는 않지만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열린 사고를 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요즘 푹 빠진 드라마는 2000년에 처음 방영된 미드 <길모어 걸스>다. <길모어 걸스>는 엄마 로렐라이와 딸 로리의 이야기다. 처음 이 드라마가 방영했을 때 나는 딸인 로리 또래였는데 이제는 엄마인 로렐라이 또래다. 이 드라마의 인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제야 넷플릭스를 통해 보게 되었다. 지금은 너무 몰아보지 않게 아껴가며 시즌 7 초반을 주행 중이다.
첫 번째 감상 포인트는 단연 로렐라이와 로리, 로렐라이와 에밀리, 레인과 김 여사, 즉 엄마와 딸의 케미다. 주인공인 로렐라이라는 고1인 로리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이다. 로렐라이는 고등학생 때 임신했지만 결혼을 선택하지 않고 싱글맘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로리라는 이름은 로렐라이의 애칭으로 딸 로리의 진짜 이름은 엄마와 똑같은 로렐라이다. 두 모녀의 이름은 로렐라이 길모어로 완벽히 동일하다. 이 이름은 원래 로렐라이의 할머니 이름으로 길모어 집안의 세 여자 이름이 다 로렐라이 길모어다. 서양권에서는 존경하는 조부모나 친척 이름을 따 아이 이름을 짓는 문화가 있기도 하지만, 극 중 로렐라이 길모어는 마치 각기 다른 세대를 살아가는 여성을 대변하는 이름 같다.
로렐라이는 에밀리 길모어의 딸이다. 에밀리는 전형적인 부잣집 부인으로 가문의 체면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굉장히 엄격하며 보수적이다. 본인의 삶은 물론이고 딸의 삶까지 본인의 계획대로 완벽하게 진행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로렐라이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혼전임신은 물론 결혼 없이 싱글맘의 인생을 선택하였고 부모님과 관계가 틀어졌다. 그치만 이 일 때문에 갑자기 부모 자식 간의 사이가 틀어진 건 아니다. 자유분방하고 유머가 넘치는 로렐라이의 성격은 FM으로만 살아온 부모님과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에밀리가 딸을 통제하려고 하는 모습이 다소 과장된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사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식을 기르고 싶은 부모의 욕망이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극 중 또 다른 엄마인 김 여사는 에밀리보다 더 과장되게 그려진다. 한국 이민 가정을 묘사하는 모습이 어떨 땐 너무 우스꽝스러워 좀 불편한 적도 있었지만, 보다 보면 재미를 위해 과장된 것을 알 수 있다. 김 여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딸 레인을 무슨 수녀원에서 기르듯 엄격하게 통제한다. 남자와 말을 섞는 것조차 안 되고 감자튀김이나 햄버거 같은 음식은 불량식품이라며 먹지도 못하게 한다. 처음에는 김 여사의 설정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 드라마가 김 여사와 에밀리를 통해 끊임없이 아이를 소유하고 싶어 하면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엄마들의 사랑과 욕망을 잘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자식들도 매번 반항하지만 점점 약해지는 엄마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다. 이들은 싸우고 화해하고 또 다툰다. 동서양과 세대를 아울러 모녀 관계는 결코 끊을 수 없는 애증의 관계인가 보다.
한편 로리는 그야말로 모든 엄마가 원하는 딸이라고 할 수 있다. 우수생에다 얼굴도 예쁘며 착하다. 엄마와 절친으로 지내며 일상에서 겪은 일이나 감정을 모조리 엄마와 공유한다. 심지어 첫 키스에 첫 경험까지 엄마에게 얘기한다. 엄마와 나이 차가 얼마 안 나서 가능할 것도 같지만, 현실에서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일상을 공유하는 모녀 사이는 존재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로리도 성인이 되고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살기 시작하며, 엄마는 진짜 친구가 아니라 엄마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닥친다. 어쩔 수 없이 엄마와 부딪힌다. 세상 쿨했던 엄마 로렐라이는 로리와 틀어질 때면, 웃기게도 사이가 좋지 않은 자신의 엄마를 찾아가 엄마로서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늘 싸워도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걱정하는 게 가족이기에, 그들은 싸워도 시간이 흐르면 또 여느 때와 같이 모여 다정한 모습으로 식사를 한다. 완벽한 타인이었다면 이렇게 적나라하게 싸우지도 굳이 화해하지도 않았을 텐데,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비슷한 듯 다른 사람들이 부딪히고 갈등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드라마는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그런 게 인생일 테니까.
로리의 남자 친구들이 바뀌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로리는 명문고에 명문대를 진학한 우등생이며, 요즘에도 인터넷에 짤이 돌만큼 인형처럼 예쁘게 생겼다. 똑똑한데 순수하기까지 하다. 모든 엄마의 워너비 딸 같은 느낌이다. 그런 딸이 만나는 남자 친구들은 하나같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웃음이 다 나온다. 현실적이라 함은 찌질함의 극치라는 것이다. 드라마에 몰입하다 보면 로리가 마치 내 딸이고 친구처럼 느껴진다. 그런 로리에게 아주 완벽한 남자가 나타나야 할 것 같은데,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듯 드라마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잘 큰 로리는 첫 경험을 유부남이 되어 버린 첫사랑과 해버린다. 이건 바람도 아닌 간통이다. 그 첫사랑은 바로 키도 크고 잘생겼으며 로리를 많이 아꼈던 딘인데 로리와 취향이 너무도 맞지 않았다. 한마디로 대화가 잘 통하지 않지만 순정적이고 잘생긴 남친이었다. 두 번째 남친 제스는 독서라는 같은 취미를 갖고 있었지만 너무 제멋대로였다. 욱하는 성질에 계속 말썽을 일으키고 결국 잘 사귀다가 잠수까지 타버리는... 말은 통하는데 성격이 그지 같은 남친이었다. 세 번째 남친 로건은 드라마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재벌 2세 역할이었다. 약간 양아치 같지만 마음만 먹으면 뭐든 잘하는 그런 남자. 하지만 화목하지 못한 집안 분위기를 갖고 있었고 로리와의 만남을 집에서 좋아하지 않았다. 이 모든 남자는 로리와 딱 그 나이에 맞는 연애를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오프닝과 엔딩, 그리고 특유의 인디적인 분위기다. 난데없이 바로 대사를 시작하는 오프닝이 좋고 갑자기 끝나버리는 엔딩도 좋다. 이런 엔딩은 흥미진진한 서스펜스나 스릴러가 아니어도 바로 다음 편을 재생하게 만드는데, 그다음 편에서도 대사가 바로바로 시작해서 너무 속이 시원하다. <길모어 걸스>는 특유의 인디적인 분위기를 시즌 전반에 걸쳐 유지한다. 시간이 흘러도 모든 세팅장은 절대 세련되어지지 않고, 배우들의 분장이나 연기도 시트콤 같기도 하고 연극 같기도 하다. 세련된 영화 같은 느낌보다는 약간 아마추어적이면서도 엉성한 면이 있다. 가끔 배경음악으로 약간 인디 느낌의 음악이 흐르는데, 어쿠스틱한 기타 선율과 자유로운 느낌의 보컬이 너무 세련되지 않아 좋다고나 할까. 로렐라이와 로리는 회당 8억인가 받고 이 드라마를 찍었다는데, 이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은 소름 끼치는 연기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대사만 줄줄이 외우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도 매력 있다. 자꾸 보게 된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너무 유치하고 고집 세며 어딘가 모자라 보인다. 어느 누구 하나 슈퍼 히어로처럼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런 인물들에게 왠지 정이 들어버렸다. 시즌 6 끝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가끔은 마음을 탁 치는 대사와 연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제 시즌 7이랑 2016년에 나온 <길모어 걸스: 한해의 스케치>가 남았다. 아쉽다. 너무 길어 다시 정주행은 하지 못할 것 같지만 이런 비슷한 미드를 넷플릭스에서 또 찾아 헤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