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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꿈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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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든 Jul 05. 2023

바바리를 입은 물고기

2023 장마 기간에 꾼 꿈



호우주의보가 있던 날이었다. 밤새 비는 쉬지 않고 내렸고 덕분에 한 번 깬 잠은 쉽사리 다시 오지 않았다. 누군가 세차게 창문을 두드리듯 빗소리엔 어떠한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아래에 무엇이 있든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은 채 모든 걸 쏟아내는 비구름이 경이로워서 빗소리가 조금이라도 잦아들면 왠지 서운한 감정까지 들었다. 하지만 역시 수재민이 생길 수도 있는 노릇이라 마냥 서운해 할 수는 없었다.


날이 밝아오자, 비는 완전히 그쳤고,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으로 흘끔 내다보니 밤새 내린 비 때문에 물이 불어서인지 커다란 물고기 몇 마리가 해안으로 들어온 다음 다시 바다로 나가지 못해 축 처져 있었다. 어부 두 분이 족히 1미터는 돼 보이는 물고기 한 마리를 옮기고 있었다. 죽은 것 같았다. 그 옆에도 똑같이 보이는 물고기 한 마리가 숨을 헐떡이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물고기가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은빛과 등 푸른빛이 섞여 있던 몸통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바바리코트가 둘러져 있었다. 누가 봐도 물고기가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는 형상이었지만, 사람들 속에 유유히 섞이는 걸음걸이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누구도 물고기를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낯짝을 보니 여전히 눈빛이 흐리멍덩하고 입을 벌리며 가파르게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창문을 열고 물고기를 불렀다.



“저, 저기요! 괜찮으세요?”



물고기가 힘겹게 돌아봤다. 어부들에게 잡히고 싶지 않은 눈치였기 때문에 일단 물고기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세요. 여긴 괜찮아요.”



물고기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하거니와 매우 지친 기색이었으므로 내가 문을 열어주자 곧바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물고기는 들어오자마자 거실 소파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더 서 있기도 힘든 모양이었다.



“괜찮으세요? 물이라도 드릴까요?”



일단 물고기가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 안도했으나, 문득 이 상황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는 곧바로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소금을 한 숟갈 타 주시겠어요?”



“아… 그렇겠군요. 네, 알겠어요.”



너무 정확한 발음에 놀랐고 호의를 받는 태도가 상당히 익숙해 보이고 우아해서 약간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서둘러 부엌으로 향해 물에 굵은소금을 탔다. 마음은 급한데 굵은소금을 찬장에서 꺼내 준비하려니 여간 손이 떨리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는 저분이 있을 곳이 아니다. 물고기에겐 한시라도 빨리 바다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물고기는 지느러미로 컵을 받아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조금씩 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건조해졌던 껍질에 다시 수분이 감돌았다. 그 모습을 보니 약간 안도가 되어 다시 창문으로 가 바깥 상황을 지켜보았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제 해안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고 어부들은 아까 잡은 물고기를 마을 안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아직 굵직한 파도가 치고 있었지만 여기보다는 나을 것이다. 



“저기요, 이쪽 뒷문으로 나가면 바다랑 가장 가까워요. 지금 사람들이 없을 때 빨리 나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두웠던 낯빛이 약간 밝아졌다. 눈꺼풀도 눈썹도 없지만 이전보다 눈이 더 또렷해 보였다.



“아, 네. 지금 바로 가죠.”



소금물로 힘을 충전했는지 물고기는 벌떡 일어나 마치 모델처럼 우아한 걸음걸이로 뒷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물고기계에서도 매력 있는 물고기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말을 정말 잘하시네요.”



순간적으로 생각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뱉고 나니 뭔가 실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물고기는 홱 돌아보며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전 상하이시티 방송국 아나운서니까요. 그럼.”



물고기는 순식간에 뒷문으로 나가 걸쳤던 바바리를 허공에 던지며 바다로 점프했다. 곧이어 세찬 파도 속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하늘과 같은 회색으로, 파도가 만들어 내는 음영이 아니면 바다인지 하늘인지 모를 그곳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여태 모르고 살아왔던 세계를 흘끔 엿본 느낌이었다. 역시 무언가를 안다고 단정 짓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아무도 믿어주진 않겠지만, 지적인 말투에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인간계와 어우러지는 물고기도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물고기는 상하이시티로 무사히 돌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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