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쿠스코]
여행사 건물에 몸을 딱 붙인 채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피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텅 빈 길거리 저 멀리서 웬 여자 세 명이 거대한 짐을 들고 달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예약을 도와주었던 여행사 직원이 내 배낭을 둘러멘 채 비를 뚫고 오고 있었다. 함께 오는 사람들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인 것 같았다. 배낭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이들이 장대비 속에서도 나를 잊지 않고 와주었다는 고마움이 한데 섞여 몰려왔다.
“숙소는 이 근처야?”
“아니… 조금 외곽에 있는데, 아마 택시를 잡아야 할 것 같아.”
내 또래로 보이는 직원의 물음에 내가 걱정스레 대답하자, 그녀는 어머니와 잠깐 스페인어로 대화하더니 이윽고 천사 같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우리 아빠가 택시 기사인데, 아마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아. 우리가 공짜로 태워다 줄게.”
남미는 늘 이렇다. 예상치 못한 고난에 욕을 하려던 찰나 늘 좋은 사람들이 나타나 선의를 베풀어 주었던 곳. 그녀의 아버지는 얼마 안 있어 커다란 밴을 몰고 나타나셨고, 우리는 우르르 올라타 카우치서핑 호스트 실베스트레의 집까지 함께했다. 주거지역이라 그런지 약간은 어둑어둑한 길거리에 그들은 걱정을 내비치며 내가 집을 잘 찾았는지 거듭 확인해주고는 떠났다.
실베스트레와는 아쉽게도 하룻밤만 머무는 일정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 짧은 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는 늦은 시간임에도 나를 환하게 맞아 주며 따뜻한 차와 먹을거리를 내왔고, 내 쿠스코에서의 마지막 밤을 불태울 수 있게 해 주었다.
“쿠스코에서 클럽을 아직 안 가봤다고?!”
그치지 않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린 쿠스코 시내로 다시 향했다. 불토를 즐기기 위해 그가 제일 좋아하는 클럽에 가서 그의 친구들을 만났고, 술과 춤을 즐긴 후 새벽 케밥까지 먹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엔 더 큰 재미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실베스트레의 오토바이로 쿠스코 외곽의 성스러운 계곡을 돌아본 것. 일명 ‘성계 투어’라고 불리는 이 코스는 보통 마추픽추와 묶어서 많이들 신청하는데, 나와는 시간도 비용도 맞지 않아 포기하고 비니쿤카와 마추픽추만 다녀온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치도 못하게 실베스트레의 제안으로 성스러운 계곡까지 단시간에 구경하고 오게 되었다. 오후 다섯 시 이카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전까지 만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을 꽉꽉 채워 쿠스코의 남은 구경거리들을 다 보고 갈 수 있었던 건 전부 실베스트레 덕분이었다.
“언젠간 꼭 미국에 놀러 갈게!”
실베스트레의 약속을 받아내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시간 맞춰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후, 페루의 와카치나 사막 옆에 위치한 오아시스 마을 이카로 향하기 위해 야간 버스에 올라탔다. 무려 15시간이나 달리는 대장정이라 그런지 마치 비행기처럼 저녁과 아침까지 제공해주기까지. 버스는 이젠 놀랍지도 않게 두 시간이나 더 걸려 총 17시간 후에야 이카의 버스터미널에 나를 내려주었다.